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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

"메르스, 양아치 사회가 '괴물의 꼬리' 건드렸다" (2015.6.24)

[인터뷰] 철학자 강신주가 본 메르스와 세월호

 

"'타인의 고통에 반응한다'는 것은 그 반응의 범위만큼 내가 책임을 진다는 것을 뜻하기도 해요. 하지만 지금, 사람들은 세계에 별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 자신의 이익에만 반응하죠. 그런 '반응 없음', 즉 양아치성이 세월호와 메르스를 만들었어요."

지난 17일 서울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 만난 철학자 강신주 박사는 이번 메르스 사태를 "의료 영리화라는 괴물의 꼬리를 살짝 건드린 것일 뿐"이라고 했다. "의료까지도 돈의 논리에 충실했던 '양아치 사회'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유리벽 바깥'에서 세월호 참사를 봤듯, 이번 메르스 사태에서도 타인의 고통에 대한 '반응 없음'이 일관되게 계속된다면 재난과 재앙은 반복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사람들이 현재까지 메르스 문제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이번엔 자기 자신이 세월호에 탄 느낌 때문 아닐까요. 세월호엔 '내'가 타지 않았어요. 그런 면에서 우리는, 유리벽 바깥에서 세월호 참사를 본 겁니다. 메르스 사태에 대한 비판이 오로지 "'내'가 위험하지 않은가"에서 출발한다면, 또 다시 세월호 참사 같은 재앙이 반복될 수밖에 없어요."

다음은 강 박사와의 일문일답. 

"괴물의 꼬리를 건드렸다. '의료 영리화'라는 괴물의"

프레시안 : 철학자의 관점에서 최근 메르스 사태를 어떻게 보고 있나. 

강신주 : 핵심엔 의료 영리화가 있다. 의료 역시 돈의 논리에 충실했던 결과다. 자본의 속성은 원래 돈이 되는 일만 좇기 마련인데, 정부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부가 정당성을 얻을 수 있는 그나마 유일한 방법은, 공익을 위해 자본을 통제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정권은 그걸 버렸다. 버리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삼성서울병원 문제도 마찬가지 아닌가. 정부가 자본을 통제해야 하는데 하지 않고 소탐대실한 결과다.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선전한 병원이, 가장 위험한 곳이 됐다. 


프레시안 : 생명과 돈. 이 두 가지 축을 놓고 본다면 세월호 참사와 이번 메르스 사태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강신주 : 규제를 자꾸만 풀어서 문제다. 공익을 위한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 낡은 배는 못 고치게 하고, 의료 역시 이윤이 아닌 공공성 확대로 가야 한다. 보건복지부에서 '보건'과 '복지'의 예산이 이렇게 편파적으로 책정된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생각해야 한다. 결국 돈 되는 것만 집중하자는 것이다. 이번 메르스 사태는 결국, '의료 영리화'라는 괴물의 꼬리를 살짝 건드린 결과일 뿐이다. 

이 사건이 마무리되고 나와야 할 제대로 된 반응은, 문형표 장관을 죽이는 것도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하는 것도 아니다. 의료 영리화의 문제가 전면적으로 전선에 나올 수 있을까. 그걸 봐야 한다. 세월호 참사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 이명박 정부 당시 엄청나게 규제를 풀어놓은 결과다. 똑같은 문제다. 사람들이 메르스 사태가 끝나면 "보건복지부를 해체하고, 박 대통령이 '복지보건부'를 만들 것", 이런 농담을 하던데, 이 농담 속에 진실이 있다. 아마 (정부는) 그런 식으로 가지 않겠나. 하지만 거기에 흡족해 하면 안 된다. 기득권 세력의 감언이설일 뿐이다. 

"'박근혜'는 무능하지 않다. 그저 양아치일 뿐"

프레시안 : '보수는 부패했어도, 진보보다 유능할 것'이라는 기대가 두 번의 보수 정권 탄생을 낳았는데, 이번 메르스 사태로 정권의 '무능'에 대한 실망감이 확산되는 것 같다. 

강신주 : 현 정권이 보수 정권이라고 하는데, 나는 아니라고 본다. 우리나라 '보수' 세력 중 장수(將帥)라고 불릴 만한 사람이 있기는 한가? 장수는 전쟁이 터지면 적진에 가장 먼저 뛰어들어 안전 여부를 확인한 뒤에 부하들을 데려온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에 적진에서 빠져 나간다. 그래야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다. 

논어에 '선난후획(先難後劃)'이란 말이 있는데, 어려운 일엔 앞장서고 그 과실은 뒤로 제쳐 놓는다는 뜻이다. 그래야 진정한 의미의 통치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정리해고를 하는 나라다. 전쟁이 나면 적진에 부하를 먼저 보내는 나라다. 그게 무슨 보수인가. 그건 양아치 집단이다. 

진정한 보수는 인간의 가치와 고귀함, 개인의 노력을 중시한다. 그러나 지금의 보수는 오로지 자신만을 아낀다. 조폭(조직폭력배)도 그렇게 하진 않는다. 그래서 감옥에 다녀와도 부하들이 떠나지 않는 것이다. 왜 우리 사회 기득권 세력을 '보수'라고 부르는지 모르겠다. 그들이 지켜야 할 어떤 정신적 가치와 고귀함을 보여준 적이 있었나? 논어의 선난후획의 가치로 봤을 때, 세월호와 메르스 사태에서 과연 이 사람들은 무엇을 했나 생각해 보면 된다. 오로지 자신의 안위, 이득만을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기득권 세력은 무능하지 않다. 오히려 매우 유능하다. 애초에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했던 집단이라면, 굉장히 유능하게 잘 빠져나가고 있는 것이다. 양아치는 먼저 빨리 도망가 본인을 지키는 게 유능한 것이다. 오직 지켜보는 우리의 눈에 무능해 보일 뿐이다. 유능과 무능으로 그들을 평가한다면, 프레임을 잘못 잡은 것이다. 애초에 그런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았는데, 뭘 기대할 수 있나? 

프레시안 : '대통령 박근혜'를 만들었던 정당 집단이나 선거 집단만이 아니라, 공공 조직인 정부 조직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았다는 실망감도 크다. 

강신주 : 왜 사람들이 다들 공무원이 되려고 하나? 공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안정된 직장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이 공무원이 되니까 공공의 이익이 아니라 당장 자신의 이득에만 신경을 쓰는 것이다. 왜? 밥줄이 걸린 직장이니까. 그 역시 무능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에만 빠른 것이다.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나오는 것처럼, 도처에 아이히만들이 있는 것이다. 혹은 아이히만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이거나. 

조직의 아랫사람이 그런 식이라면 그래도 괜찮다. 문제는 '고위급 양아치'들이다. 그들이 위험하다. '모두가 양아치'라고 해서, 양비론으로 보면 안 된다. 오십보와 백보는 다르다. 사람을 해쳤다는 차원에서, 사람을 죽인 것과 엉덩이를 걷어찬 것은 같지 않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위정자들의 '백보'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래야 사회가 좋아진다. 

"전 사회의 양아치화…그게 세월호를 낳았다"

프레시안 : 결국 전 사회가 '양아치화' 되어가고 있다는 이야기인가?

강신주 : 어떻게 보면 모두가 피해자다. 양아치성의, 독재의, 자본주의의 피해자다. 나의 먹고 사는 문제, 즉 동물성에만 집중하도록 훈련된 것이다. 독재에 저항하지 못하고 숨 죽여 지냈던 게 수십 년이고, 이후 돈의 가치에 올인해 돈만 있으면 사람을 죽여도 된다는 인식이 박힌 게 또 수십 년이다. 권력자에게 숙이고 자본가에게 숙인다. 무서우니까, 살아야 하기 때문에 권력자에게 숙이고, 돈을 벌고 먹고 살아야 하니 자본가에게 숙이는 것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에서 얼마나 자유로운가? 

산 위로 올라가는 만큼 내려오는 시간이 걸린다. 개발 독재의 추억이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심지어 지식인 사회에서도 '박정희는 독재는 했지만 그래도 경제는 발전시켰다'라고 말한다. 장하준도 그런 소리를 하지 않나. 그런데 경제 발전만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세월호를 계속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작은 이익이라도 생기는 것 아닌가. 보건 예산도 집행하면 안 된다. 돈 되는 의료만 하면 된다. "그래도 경제는 발전했잖아"라는 인식, 그게 세월호를 탄생시켰다. 

사람들의 꿈이 모두 '이건희'가 되어버렸다. 공정한 사람이 되려는 꿈을 꾸는 사람은 없고, 그런 꿈을 장려하지도 않는다. 그저 "서울대 가라"고 말할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지성인이 있다고 할 수 있나? 지성인은 기본적으로 공동체를 생각하는 사람이다. 자신만 생각하는 것은 짐승도 한다. 어떤 게 맛있나, 어떤 게 나에게 좋나, 이런 생각은 사유가 아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는 말에서, '생각'이란 공동체를 생각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 사회가 거대한 이익 다툼의 세계가 된 셈인데 그렇다고 공적인 것, 희생을 개인에게 강요할 수 없다. 그걸 강요한다면 전체주의 사회다. 결국 자발성의 문제인 것이다. 

프레시안 : 그렇게 견고한 '공공성 없음'의 사회에서, 개개인의 저항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 

강신주 : 길게 봐야 한다. 짧은 기대를 하면 금방 실망하기 마련이다. 또 연대와 유대를 맺는 가난한 이들 역시 자신의 이득에 골몰해선 안 된다. 유사 이래로 권력자들이 다수를 지배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을 분열시키는 것이었다. 순간의 불이익을, 어떻게 견뎌낼 것인가의 문제다. 순간적인 힘듦을 견디지 못하면 정상에 오를 수 없다. 

왜 사람들은 메르스 사태에 더 분노하나

프레시안 : 세월호 참사나 메르스 사태나 생명보다 이윤을 중시하는 풍토에서 비롯된 것은 비슷하지만, 두 사안에 대한 사람들의 민감도는 좀 다른 것 같다. 

강신주 : 사람들이 현재까지 메르스 문제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이번엔 자기 자신이 세월호에 탄 느낌 때문 아닐까. 세월호엔 '내'가 타지 않았다.

타인의 고통 앞에서 우리는, 나는 고통 속에 있지 않다는 것을 생각한다. 이웃의 고통을 위로하지만, 그 위로를 통해 '나는 괜찮아'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위로했다고 생각하지만, 위로했다는 그 행위 자체가 좋은 것이다. 사람에겐 그런 측면이 있다. 죽은 자의 문상을 가지만, 그날 확인하는 것은 나는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과 안도감 아닌가. 그렇게 자신이 잠재적인 죽은 자가 될 수 있다는 공포, 내가 세월호의 승객일 수 있다는 공포를 잊는다. 타인의 고통이 측은하기도 하고, 나도 저런 고통을 당하진 않을까 두렵기도 하고, 나는 그런 고통이 당장에 없다는 사실에 편안함을 느끼기도 한다. 

세월호엔,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타고 있었다. 만약 '내'가 탔다면? 그렇게 생각하고 애도하고 분노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잊는다. "그래, 내가 안 탔잖아".

그런 면에서 나는 조문을 너무 빨리 했다고 생각한다. 조문을 했다는 것은, 장례를 치르고 사건을 이제 그만 마무리한다는 의미다. 원래 사인이 분명하지 않으면 관 뚜껑을 덮지 않는 법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았는데 너무나 서둘러 관 뚜껑을 덮어버리지 않았나. 그래서 '조문의 정치'가 나는 싫었다. 

그렇게 세월호가 금방 잊혔다. 유족들이 '내 애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직도 모른다'고 통탄할 때, 처음엔 공감했지만 나중엔 그만 하라고 했다. 그건 공감하다가 지쳐 무관심해진 것이 아니다. 원래 본질은 '무관심'이었다. 무관심해도 고통을 느낀 척 할 수 있다. 영화관에서 슬픈 영화를 보고 울다가도, 불 켜지고 나면 잊어버리고 웃지 않나. 


"유리벽 밖에서 세월호 참사 본 사람들…이번엔 모두가 '세월호'에 탔다"

프레시안 : 우리 사회가 유독 그런 속성이 더 심한 측면이 있나? 

강신주 : 그렇다. 우리는 '내가 살아야 한다'는 의식이 너무 강하니까. 영어로 'response(반응)'란 말이 있다. 여기에다가 'ability(~할 수 있음, 능력)'를 붙인 것이 'responsibility(책임)'이다. 결국 책임이란 말은, '타인의 고통에 대해 반응할 수 있음'을 뜻한다. 반응은 애정에서 출발하지 않나. 어떤 이가 아파 보인다고 하면, 다친 그를 업고 가는 것 반응이다. 타인의 고통에 반응한다는 것은 그 범위만큼 내가 책임지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은, 사람들이 세계에 별로 반응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 반응한다. 먹고 사는 것, 그것에만 반응한다. 

한국인들은 독재를 경험하며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면 잡혀가고, 자신 역시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것을 익혔다. 아직도 독재의 후유증과 자상이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검투사 사회'라는 말을 한다. 타인에게 반응하면 내가 죽을 수도 있으니, 본능적으로 꺼리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유리벽 바깥에서 세월호 참사를 본 것이다. 우리가 느꼈던 고통, 슬픔이란 것은 유리벽 바깥에서, 영화관 관중석에서 영화 보듯 목격한 것이다. 그런 행위가 우리가 'response(반응)'하고 있다는 느낌도 주지만, 본질적으로는 못하고 있는 것이다. 스마트폰을 통해 세계와 소통하고 있다고 믿지만, 결국 소통하지 못한 것과 같다. 다만 소통의 제스처를 취하는 것이다.

이 조건 속에 우리가 있다. 애초에 세월호 참사를 보며 '아, 정말 큰 폭풍우가 왔구나'라고 했을 때 세계와 소통하고 세계를 느끼고, 감당하고, 공감했던 상태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후에 '나는 괜찮아, 폭풍우 속이 아니잖아', 그리고 '난 폭풍우 속이 아니니까 이제 그만 잊어버려', 이런 반응이 순차적으로 나온 것이다. 

프레시안 : 이번 메르스 사태도 비슷한 '반응 없음'이 이어질 것이라고 보나? 

강신주 : 이번 메르스 사태에 대한 사람들의 느낌은 조금 다르다. "우리 다 같이 세월호에 타고 있는 것 아니야?" 이렇게 느끼는 듯하다. 하지만 그 역시도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은 아니라고 본다. 

메르스가 창궐하니까 사람들이 서로의 접촉조차도 두려워한다. 이런 현실에 불만은 다들 갖지만, 저항은 일어나지 않는다. 세월호는 그래도 집회라도 있었다. 메르스 사태에서 그게 가능한가? 

메르스 사태에 대한 비판이 오로지 "'내'가 위험하지 않은가"에서 출발한다면, 또 다시 세월호 참사 같은 악순환이 반복될 것이다. 자본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을 때 어떤 위험이 있는지를, 이미 우리는 세월호 참사에서 배우지 않았나. 그런데 또 반복됐다. 

사랑이란 것은 곧 감염이다. 키스를 했을 때 그 사람의 타액이 내 안에 들어오는 것이다. '콜레라 시대의 사랑'은, 한 마디로 감염의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것이다. 서울광장을 덮을 만한 사건인데도, 사람들이 거리에 나오지 않는다. 우리의 '사랑 없음'이 그 정도인 것이다. 

우리가 그 정도의 감수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세월호를, 메르스를 막지 못한 것이다. 유리창 밖에서 댓글을 달고, 분노하면서 'response(반응)'하고 있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아닌 것이다. 

이번 메르스 사건을 어떤 격리, 분리를 통해 세월호처럼 만들지 않길 바란다. "나도 걸리면 어쩌지?"라는 공포에서 "괜찮아, 난 삼성병원 안 갔어"라는 안도, 그리고 "그만 좀 하지? 전염병은 어느 사회나 있었잖아"라는 거부감. 그리고 끝. 그런 식의 분리가 반복되어선 안 된다. 암벽 로프에 두 사람이 위태롭게 매달려 있다면, 아래쪽에 매달린 사람이 먼저 줄을 자르기 전까지, 절대 위쪽의 사람이 줄을 잘라선 안 된다.  

'양아치 시대'의 언론, 그리고 <프레시안>

프레시안 : '양아치 시대'의 언론의 역할은 어때야 한다고 보나? 

강신주 : 이런 시대에선 더욱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언론이 나와야 하지 않겠나.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건, 언론과 언론인이 생계의 압박을 느끼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해 운영하고 있는데, 그 역시 그런 차원의 노력 아니겠나. 대자본에 의해 휘둘리고 움직이지 않으니 바람직한 상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본다. 

과거엔 언론이 국가의 검열과 싸워야 했다. 이후 더 강력한 검열이 언론에 왔다. 기업의 협찬, 광고를 받기 위한 보도들…차라리 정부의 검열은 저항하면 되니까 오히려 단순한 문제였다. 이젠 많은 언론사들이 검열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에 자발적인 복종을 한다. 이게 더 무서운 것이다. 왜 이번 메르스 사태 때 <프레시안>은 삼성병원의 실명을 처음으로 공개할 수 있었고, 다른 '진보' 매체들은 보도하지 못했나. 가벼운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또 하나, 언론인의 소명이 이제는 단순 뉴스 전달은 아닌 것 같다. 스마트폰이 발달해 신속 정확 보도만으론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지금 시대에서 언론이 해야 할 또 다른 역할은 '버티기'가 아닐까. 많은 언론사가 '트랜디(trendy)한' 뉴스를 따라가더라도, 세월호 참사나 공적 규제 완화 같은 '지난 뉴스' 취급을 받는 이슈들을 꾸준히 다뤘으면 한다. <프레시안>이 다른 언론들보다 더 오래 버티는, 압정같은 펜의 역할을 해줬으면 좋겠다. 

이 인터뷰는 전홍기혜 편집국장이 진행하고 선명수 기자가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