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피플/노무현

한명숙 총리, '안전 항해' 할 수 있을까?(2006.4.20)

헌정 사상 '첫 여성 총리'인 한명숙 총리는 20일 오전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은 뒤 정부 중앙청사에서 취임식을 갖고 공식 업무를 시작했다.

한 총리는 지난 19일 총리 직의 관문인 국회 인사청문회를 재적 의원 297명 중 182명의 찬성으로 무난히 통과해 '헌정사상 첫 여성 총리'라는 영예를 안게 됐다. 김대중 정부 시절 인사청문회에서 장상 전 총리서리가 좌절한 이후 4년 만의 일이다.

그러나 고건, 이해찬 전 총리에 이어 제3기 노무현 정부를 이끌어야 할 그의 앞에 놓인 길이 그리 평탄치 만은 않아 보인다. 자칫 레임덕에 빠지기 쉬운 대통령 임기 후반기에 '참여정부호'를 이끌고 무사히 '안전항해'를 해 나갈 수 있을까? 이를 위해 대통령과의 역할 분담을 적절히 해 나갈 것인가? 또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여러 가지 궁리가 많은 여당과 정부 간의 '가교' 역할도 잘 해낼 수 있을까?

***한 총리, '국정장악력'에 대한 우려는 불식 못시켜**

5.31 지방선거를 앞둔 민감한 시기인 데다 전임 총리가 개운치 않은 사안으로 낙마했다는 점에서 여권에선 이번 총리 인사청문회를 놓고 걱정이 많았다. 그러나 "참여정부 임기 후반기 안전항해의 첫 관문인 인사청문회를 무사히 통과할 인사"라는 기준을 우선시해 선택된 후보답게 한 총리 인사청문회는 별다른 쟁점 없이, 심지어 국민들의 큰 관심조차 끌지 않은 가운데 조용히 지나갔다.

한국여성단체연합 대표를 지내는 등 이른바 '여성계 대모'인 한 총리를 '응원'하기 위해 여성계 인사들이 대거 청문회를 보러 오는 등 첫 여성 총리 탄생에 대한 강한 기대감도 현재 군 복무 중인 아들의 보직 청탁 의혹, 1조원 대 사기극에 연루된 업체의 행사 참석 등 야당이 제기하는 몇몇 의혹을 불식시키는 데에 일조했다.

여권 내에서 노리고 있는 '강금실(서울시장 예비후보)+한명숙'의 시너지 효과가 이번 인사청문회에서 유감없이 발휘된 셈이다.

하지만 한 총리는 이번 청문회 과정에서 '국정장악력'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키는 데에는 실패했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에 대해 "독재자의 딸"이라고 말한 것에 대해서는 사과하는 등 '화합형' 지도자로서의 면모는 충분히 보여줬지만, 이른바 '실세총리'였던 이해찬 전 총리의 바통을 이어받아 '책임형 총리'로서 제대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주지는 못했다는 지적이다.

인사 청문회 과정에서 한나라당 이한구 의원은 "한 총리 지명자가 양극화 원인이나, 부동산 투기 원인, 자유 시장경제 원리 등 기본적인 부분에 대한 책임의식이 적거나, 문제 해결책을 제시하는 능력이 많이 떨어진다"며 "많은 부분에서 정부ㆍ여당의 논리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한나라당 진수희 의원은 "한 지명자는 환경부와 여성부 장관 시절 새만금 간척, 천성산 및 사패산 터널공사 문제에 대해 무책임으로 일관하는 등 정책조정과 갈등해결 능력에 커다란 흠결이 있다"고 주장했다.

민주노동당 단병호 의원도 한 총리가 비정규직과 사회 양극화 문제에 대한 입장이 명확하지 않다는 점을 문제로 지적하기도 했다.

또 청문회 도중 총리실 관계자들이 한 총리에게 답변과 관련된 쪽지를 건네는 것을 보고 한나라당 의원들이 "뒤에 앉은 분이 너무 자주 답변을 대신 써주는 것은 한 지명자의 능력을 검증하는 데 부담이 된다"고 문제 삼는 일도 있었다.

***노 대통령, 재계와 접촉 늘리는 등 '경제 챙기기'**

이에 따라 실질적인 책임과 권한을 갖고 내치를 책임지던 이해찬 전 총리 때와 달리 청와대가 전면에 나설 것이란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한 총리를 총리 후보로 지명하면서 청와대는 "분권형 총리가 아니라 책임총리"라며 총리 역할에 변화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시인하기도 했다.

노 대통령은 한 총리에게 임명장을 수여하면서 "총리직 수행에 있어 상식적 판단과 균형 감각이 중요하다"며 사회 갈등 조정과 통합에 무게를 실었다. 한 총리도 "사회적 갈등을 잘 조정하고 사회적 합의를 이루는 모습을 국민들게 보여주는 게 총리의 역할"이라고 화답했다.

특히 한 총리가 경제에 취약하기 때문에 노 대통령이 직접 '경제 챙기기'에 나서고 있다. 노 대통령은 지난달 28일 대한상의 초청으로 주요 기업 CEO 350여 명을 대상으로 특강을 가진 데 이어 지난 1일 경제5단체장을 청와대로 초청해 부부동반 오찬 모임을 가졌다. 지난 주 한덕수 경제부총리 등 경제부처 장관들과 식사를 겸한 비공식 간담회를 갖고 재계가 요구하는 출자총액제한제도 폐지 문제를 검토한 것으로 전해지기도 했다.

노 대통령은 또 국무조정실장으로 청와대 경제수석 출신인 김영주 수석을 임명했다. 이에 따라 청와대와 총리실 사이에 김병준 대통령정책실장-권오규 대통령경제정책수석비서관-김영주 실장이 경제정책라인으로 힘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이해찬 전 총리 시절 막강해진 총리실의 권한도 재조정될 전망이다.

또 내각 통할의 문제에서도 각 분야 '책임장관'들의 비중이 커질 전망이다. 노 대통령이 이해찬 전 총리 체제에서 도입한 '책임장관제'는 사실상 내각 안에서 친노(親盧) 장관들에게 권한을 주는 방식으로 운영돼 온 측면이 크다. 한 총리 체제에선 한덕수 경제부총리, 김우식 과기부총리, 이종석 통일장관, 유시민 복지장관, 천정배 법무장관, 정세균 산자장관 등의 목소리에 힘이 실릴 것으로 보인다.

***지방선거 때까지 발목 잡힌 한 총리…노 대통령, 다시 정치 전면에?**

당·정·청 관계에서도 적잖은 변화가 예상된다. 이해찬 전 총리가 당과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갖고 이끌었다면 한 총리 체제에서는 당의 역할이 좀 더 커지지 않겠냐는 것이다.

특히 5.31 지방선거의 중립성 문제와 관련된 야당의 당적 포기 요구에 대해 한 총리는 "책임정치를 위해 당적은 유지하겠지만 선거 기간 동안 위기라든지 급박하게 해결돼야 하는 일 외에 당정협의를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따라서 지방선거가 끝날 때까지 한 총리가 당과의 관계에서 역할을 할 여지가 좁아졌다. 5선 의원이자 김대중, 노무현 두 대통령을 만드는 과정에서 '전략기획통'으로 공을 세운 이해찬 전 총리와 비교할 때 재선 의원 출신인 한 총리가 여당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은 미미하다. 따라서 이강철 대통령 정무특보 등 당 안팎의 대통령 측근 인사들이 바빠질 것으로 보인다.

요즘 노 대통령은 지방선거를 의식해 외부 일정을 줄이고 돌출 발언도 자제하는 등 신중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여당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지방선거가 끝날 때까지는 이런 흐름이 유지될 전망이다.

***지방선거 후 정개개편이 이뤄질 경우 총리의 역할은?**

그러나 문제는 5.31 지방선거 이후다. 따라서 한 총리가 노 대통령에게 득이 될지, 부담이 될지 본격적으로 판명될 시기도 바로 이 때다.

지방선거에서 다행히 여당이 참패하지 않을 경우에는 피할 수 있겠지만, 만약 지방선거에서 여당이 야당에 크게 패한다면 정치권이 요동칠 가능성이 농후하다. 무엇보다 서울시장 선거 결과는 중요한 잣대가 될 전망이다. 게다가 지방선거에서 여당이 참패한다면 그 여파는 곧바로 있을 7월 재보선에도 이어질 것이다.

그래서 선거 결과에 따라 여당 발(發) 정계개편이 촉발돼 노 대통령이 다시 정치 전면에 나설 수도 있다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스스로 정치하는 총리였던 이해찬 전 총리와 달리 한 총리가 당과 관계를 틀어쥐고 노 대통령을 지원 사격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오히려 한 총리의 역할은 정부 내 '동요'를 최소화하는 데 머물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이 전 총리 때와 달리 한 총리 체제에선 노 대통령이 경제와 정치 전면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 이는 곧 야당과 일부 보수 언론의 화살이 노 대통령에게 집중된다는 의미로 그 만큼 노 대통령이 감수해야 할 위험이 커진다.

'첫 여성총리'에 대한 기대감으로 비교적 높은 국민적 지지 속에서 취임하는 한 총리가 "국민의 평안과 행복으로 가는 배의 선장"이 될 수 있을까? 집권 후반기 기강이 해이해진 공직사회와 '대선'이란 목표를 향해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정치권의 틈바구니에서 난항을 거듭하지는 않을까?

막 '항해'를 시작한 한명숙 총리를 바라보는 시선엔 기대와 불안이 어지럽게 교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