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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노무현

후보 24시 <1>-노무현

"촌놈은 촌놈답게 합시다" (2002.1.21)


웃어야 한다. 짜증나고, 화나고, 아무리 피곤해도 일단 대중 앞에 서면 웃어야 한다. 이게 정치인들의 기본 철칙이다.


그런데 대중과 함께 하는 공식 행사 도중, 그것도 인터넷을 통해 생중계되는 행사 도중 버럭 화를 내는 정치인을 봤다. 이게 이 사람만의 매력일까, 아니면 치명적 단점일까?

지난 17일 민주당 대선 경선후보인 노무현 상임고문을 하루 종일 밀착취재해 보았다.

노 고문을 직접 만난 것은 작년 10월 4일 인터뷰 이후 처음이었다. 우선 눈에 띄는 변화는 새치가 좀 늘었다는 것과 담배를 끊었다는 점. 노 고문은 지난해 가을 담배를 끊었다.

비밀 조찬, 일일보고, 정책학습

엄밀히 말하면 노 고문을 하루종일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라는 데스크의 지시를 완수하진 못했다. 지지자를 한명이라도 더 확보하느라 분주한 경선 후보들의 하루엔 언론에 공개하기 곤란한 ‘물밑 작업’도 끼어 있기 때문.

이날 각종 언론 인터뷰, TV 토론 연습, 인터넷 카페에서의 사이버 유세 등이 주요일정이었던 노고문은 아침, 점심, 저녁 식사 시간에 보좌관과 함께 사라졌다. 도대체 누굴 만날까 꼭 따라가 보고 싶었지만 거절당했다.

이날 노 고문은 오전 7시경 서울 종로구 명륜동 자택을 나섰다. 그는 시청 근처에서 아침 약속을 마치고 여의도 민주당 당사에서 있었던 당무회의에 참석했다.

노 고문이 민주당사 근처인 경선 캠프 사무실에 도착한 것은 오전 10시 30분.

그는 10평 남짓한 개인 집무실에서 윤석규 상황실장, 유종필 언론특보 등의 일일 보고를 받았다. 이날 있었던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의 연두기자회견에 대한 논평 발표 여부가 주로 얘기됐다. 보좌진들은 논평을 내자고 했으나 노 고문은 “매 사안마다 단발성 반응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반대했다. 괜한 트집 잡기로 보일 일은 하지 말자는 것이다.

11시경부터는 정책학습 시간. 이날은 전현직 문화계 관료들과 문화 정책에 대해 공부했다. 중간중간 영화배우 문성근씨를 포함해 3-4명의 지지자가 방문하기도. 11시 50분경 노고문은 여의도 부근의 점심약속을 위해 사무실을 나섰다.

“촌놈은 촌놈답게 합시다”

오후 1시가 넘어 다시 캠프 사무실로 돌아온 노 고문은 2시경부터 TV 토론 연습에 들어갔다. 이번이 첫 대선 출마인 노 고문에게 TV 토론은 부담스럽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태도나 표정에서도 어색함을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주말에는 영등포 모 케이블 TV 스튜디오를 빌려 연습하지만 평일에는 사무실에 비디오 카메라를 설치하고 연습한다. 노 고문은 내부 참모진 4명과 공무원노조, 노사정위원회, 비정규직 근로자 문제 등 노동정책에 대한 예상질문과 답변을 정리했다.

이날 연습은 민주당 경선 주자들의 TV토론 준비과정을 취재하러온 ‘MBC 9시 뉴스’ 취재진 때문에 30여분 만에 끝났다.

10분만에 인터뷰를 끝내고 노 고문은 집무실 구석에 놓여있는 책상에 앉아 이후에 있을 언론 인터뷰 질의서를 읽었다.

기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중 한 보좌진이 노 고문에게 ‘저녁에 있을 사이버 유세에서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 시를 낭독했으면 좋겠다’며 정호승 시인의 시 3-4편를 들고 왔다. 노 고문은 탐탁치 않은 눈치였다.

“꼭 해야 됩니까. 그냥 촌놈은 촌놈답게 합시다.”

결국 ‘분위기 있는 카페에서 시를 낭독하는 노무현’을 연출하고 싶었던 보좌진들의 계획은 산산이 부서졌다.

“개혁후보간 연대 안 하십니까”

오후 3시 다시 서너명의 기자가 몰려왔다. KBS 등 방송4사 기자들은 이날 논란이 됐던 ‘민주당 경선주자들의 현정부와 차별화 문제’와 ‘국민경선제 조기과열 우려’ 등에 대한 노고문의 입장을 물었다.

카메라 앞에서 노 고문은 말에 유난히 신경을 썼다. 한참을 말하다가 ‘다시 합시다’를 연발했다.

20분가량 인터뷰를 진행한 뒤 함께 차를 마시다가 한 기자가 기자의 도를 벗어나는 발언을 했다. 노 고문에 대한 자신의 개인감정을 담아 이렇게 질문한 것이다.

“김근태 고문과 연대는 안 하실 겁니까. 지금 상황이 꼭 87년에 DJ와 YS가 갈라섰던 때와 비슷한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순간 최근 언론전문주간지 ‘미디어오늘’에서 현직 기자들을 대상으로 차기 대통령 적임자를 묻는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노 고문이 1위를 차지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노 고문은 “기자가 이렇게 편파적이어도 됩니까”라며 웃었다. 그는 “선호투표제 때문에 기술적으로는 연대가 불필요할 수 있지만 두 사람이 손잡고 국민들 앞에 서는 것 자체가 정치적 의미가 있다”며 “가장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덧붙였다.

“마누라가 분만 바르라고 했는데...”

“우리 마누라가 딱 분만 약간 바르라고 했는데... 때마다 이러지 말고 집사람을 잘 교육시켜 주세요.”

3시 40분경 메이크업 담당자에게 얼굴을 맡긴 노고문은 어색한 기색이 역력했다. ‘촌놈은 촌놈답게 해야 한다’지만 노 고문도 이미지 관리를 소홀히 할 수 없는 듯. 특히 이날은 오후 4시에 정치전문 웹진 이윈컴(www.ewincom.com)에서의 동영상 촬영, 저녁에 사이버 유세가 있었다.

노 고문의 이미지 관리를 자원한 한 디자이너가 메이크업 담당자와 코디네이터를 데려왔다. 처음에는 “시키는 대로 해야지”라며 고분고분했던 노 고문은 15분이 넘어도 화장이 끝나지 않자 “이거 야반도주하겠다는 말 나오겠네”라며 불편해 했다.

노 고문이 화장을 하는 동안 홍보팀장은 태극기와 민주당기를 집무실에 가져왔다. 전에 노 고문이 지시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천장이 낮은 사무실에 커다란 태극기와 당기는 좀 우스꽝스러웠다. 이를 본 노고문은 “나 태극기, 당기 갖다놓으라는 말 안했다. 설사 내가 말한 것이라도 본인이 판단해 어울리지 않으면 듣지 말아요”라고 말했다.

“조선일보와 싸움 끝까지 한다”

오후 4시부터 노고문은 ‘이윈컴’, ‘코리아 타임즈’, 컴퓨터 전문잡지 ‘하우 PC’와 연달아 인터뷰를 가졌다. 어느 후보나 각종 매체의 인터뷰 요청을 거절하기 힘들지만 노 고문은 더욱 그렇다.

그는 지난 91년 ‘주간조선’의 ‘노무현 의원은 과연 상당한 재산가인가’라는 기사에 대해 조선일보를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한 이래로 소위 주류언론의 '횡포'에 맞서 왔다.

조선일보와의 싸움 때문에 노 고문은 잃은 것이 많다. ‘과격하다’, ‘불안하다’, ‘주변에 적이 많다’ 등 노 고문의 부정적인 이미지들은 이 싸움과정에서 생겼다. 그러나 노 고문 캠프의 한 관계자는 “조선일보와의 싸움은 끝까지 한다”고 말했다. 눈앞의 이익을 위해 조선일보의 ‘횡포’를 모른 척 하지 않겠다는 것.

덕분에 노 고문은 지난해 ‘뜨거운 감자’였던 ‘언론개혁’에 대해 명확한 지지입장을 표명했고 집권하면 청와대 기자실을 개방하겠다고 말한다. 그러니 아무리 작은 매체에서 인터뷰 요청이 와도 거절하기 힘들다.

눈물겹도록 고마운 ‘노사모’

두 시간 넘게 계속된 인터뷰를 마치고 노고문은 저녁 약속장소인 시청 근처로 갔다. 기자는 노무현 후원회 회장과 저녁식사를 하고 오후 8시경 노 고문의 사이버 유세가 있을 대학로의 인터넷 카페 ‘넷가(net.家)’를 찾았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동시에 토론하는 사이버 유세는 대선 경선 사상 처음이었다.

8시 30분, 노 고문은 참석자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카페에 들어섰다. 그는 참석자들에게 일일이 한 사람씩 악수를 나누며 인사했다.

노 고문은 인터넷을 활용한 사이버 선거 전략에 있어 다른 주자들보다 한발 앞선다고 평가된다. 회원이 7천명에 달하는 네티즌들의 자발적인 모임인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 덕분이다. 노사모(회장 명계남)에 대해 그는 “눈물겹도록 고맙다”고 말한다. 사이버 유세도 노사모에서 준비한 것.

또 노 고문 자신이 컴퓨터에 관심이 많다. 그는 80년대 처음 컴퓨터를 공부하고 국내에서 ‘명필 장원’이라는 8비트짜리 워드프로세서가 처음 나왔을 때 샀을 만큼 관심이 많았다. 새로운 것에 대한 왕성한 호기심 때문이다.

이날 행사는 10명의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관계자들을 비롯해 50여명이 참석했으며 영화배우 명계남씨의 사회로 1시간 30분간 진행됐다.

“선거법 위반했다면 고발하라”

원래 이 행사는 40대 중년을 위한 커뮤니티 사이트인 ‘(주)넷피플(www.people475.com)’에서 ‘475초청 간담회-대선예상후보와 함께’라는 행사를 기획, 대선주자들을 초청해 생중계할 예정이었다.

이날 오전 선관위가 넷피플에 ‘선거법에 저촉될 수 있다’는 공문을 보내와 노고문의 홈페이지(www.knowhow.or.kr)에서 채팅 및 생중계하기로 선관위와 협의했다.

선관위는 행사장에 직접 찾아와 두 차례나 노고문에게 ‘이런 식으로 진행하면 선거법에 저촉된다’는 쪽지를 보냈다. 두 번째 쪽지를 받아든 노고문은 “정치인이 일상적인 정치활동을 하는 것까지 막으면 어떻게 하느냐”며 “선거법을 위반했다고 판단되면 고발하라”고 목소리를 높여 분위기가 굳어지기도 했다.

행사가 끝나자 노 고문은 선관위 관계자들에게 악수를 청하며 “일상적인 정치활동마저 막으면 어떻게 하냐”며 “선거법을 위반했다고 판단되면 고발해라, 그러나 웬만하면 고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화해를 청했다.

노고문은 행사를 마치고 곧바로 주간지 ‘아이 위클리’와 인터뷰를 가졌다. 전자정부, IT 정책 등 다소 난해한 질문이 계속되자 노 고문은 원론적인 답변만 하며 “내가 외운 게 이것 밖에 없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푹 잡니다. 하루 6시간은 꼭 잡니다”

노 고문은 바쁜 와중에도 하루에 6시간은 꼭 잔다고 한다. 노고문은 20분정도 인터뷰를 한 뒤 명계남씨 등 노사모 사람들과 얘기를 나눴다. 노사모 사람들은 “국민경선제에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참여시키겠다”며 노 고문을 격려했다.

10여분 뒤 보좌진들이 다가왔다.
“이제 댁에 가셔야지요.”

보좌진들은 다음날 오전에 충북 청원까지 가야 한다며 귀가를 서둘렀다. 10시 40분경 노 고문은 보좌관과 기자의 배웅을 받으며 검은색 체어맨 승용차에 탔다.

“수고 많았습니다.”

차에 오르며 노 고문이 기자에게 던진 이 한마디에 두 사람은 비로소 홀가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