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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김근태

[대선읽기] 김근태를 가슴에 묻고 "2012년을 점령하라" (2012.1.2)

꼭 10년 전 일이다. 2002년 봄으로 기억된다. 그해도 대선이 있었고, 정치권 안팎은 민주당에 처음 도입된 국민참여경선을 통한 '노무현'이란 스타 정치인 탄생에 열광하고 있을 때였다. 대중을 휘어잡는 거침없는 화법, 자신에 대한 공격을 능수능란하게 되받아치는 뛰어난 임기응변력, 무엇보다 대세론을 이루고 있던 상대방 이회창 후보와 정반대인 살아온 이력과 소탈한 성격. '바람'은 거셌고, 그만큼 대중들의 '열망'도 커졌다.

두 달 간의 이 축제에 겉으론 웃었지만, 속으론 웃을 수 없었던 이들이 당시 경선에 참여했던 후보들이었다.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2002년 3월 12일 7명의 후보 가운데 가장 먼저 경선 포기를 선언했다. '민주화운동의 대부'인 김 고문은 당시 경선 후보들 중 노무현과 정치적 노선에 있어서는 가장 가까웠지만, 스타일은 정반대였다. '여의도 햄릿'이 별명이던 그는 진중하지만 기민성은 떨어졌다. 이 역시도 85년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고문기술자' 이근안에게 당한 전기고문과 물고문의 영향 때문이라는 게 주변인들의 증언이다.

그즈음 기자는 아주 우연히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한 술집에서 김 고문을 만났다. 김모 시인이 평소 지인들과 모인 자리에 김 고문이 뒤늦게 합석했다. 참석자 중 한 사람이 김 고문에게 오라고 여러 차례 종용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술자리는 길어졌고, 술집 주인까지 끼어들게 되면서 그 작은 술집은 일행의 하룻밤의 '해방구'가 됐다. 막판엔 70년대 팝음악을 틀고 춤까지 추었다. 그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봤다. 김 고문의 춤추는 모습을. 평소 그의 성격을 보건데 그와 춤춰본 유일한 여기자일지도 모른다.

그는 춤도 참 그답게, 점잖게 췄다. 허한 마음에, 술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강권으로 수줍어하며 허우적 허우적 팔다리를 놀렸다. 70년대의 흥겨운 디스코 음악에 맞춘, 탈춤도 아닌, 다른 무슨 춤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느릿한 그의 춤사위가 참으로 슬퍼보였다. 그 세대의 많은 이들이 그랬겠지만, 젊은 시절 맘 편히 춤춰본 일이 있었을까. 정치권에 입문한 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보다는 늘 바른 말을 하는 비주류의 길을 탁했지만 '첫 대선 후보 경선 중도 사퇴'라는 성적표는 그로서도 흔쾌히 받아들기 힘든 것이었으리라. 그날 '여의도 신사' 김근태는 인사동에 와서 그렇게 일탈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일탈'을 은밀히 즐겼다.

새벽녘 헤어지면서 김 고문은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손을 일일이 꼭 잡으며 "고맙다"고 인사를 건넸고, 기자는 그에게 "의원님, 힘 내십시오"라고 술김에, 아니 진심을 담아 말했다. 당시 거리에 피어있던 꽃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달큰한 봄 향기를 맡으며 여전히 춤추는 듯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가슴이 저려왔다. 취재원으로 만난 정치인들 중 가장 애틋하게 다가왔던 게 김근태, 바로 그였다.

정치는 정의를 다투는 공간이다. 민의를 대변하는 일이 대의 민주주의에서 정치인이 하는 일이기에 '공익'과 '정의'는 최우선의 가치다. 하지만 정치는 선거를 통해 승패를 다투는 공간이기도 하기에 항상 '정의'가 앞서지는 않는다. 좀 더 현미경적 관찰을 하면 정치인들 중에 이기기 위해 '공익'과 '정의'는 저 뒤로 물리는 이들이 대다수다. 지더라도, 깨지더라도, 끝까지 '옳은 일'을 택하는 정치인은 드물다. '정치인의 거짓말'에 대한 뉴스가 끊이지 않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선거 때 '공익'에 따른 약속을 했다가 당선되고 나면 뒤집는 게 다반사다.

그런 점에서 김근태는 '미련한 정치인'이었다. 한미 FTA, 의료 민영화, 아파트 분양 원가 공개, 이라크 파병 등 그가 속한 정당의 정치인들이 '이기고 나서', '이기기 위해' 숱하게 말을 바꿨어도, 그는 끝까지 고집했다. 부동산 원가 공개와 관련해 "계급장 떼고 붙어보자", 한미 FTA와 관련해 "참여정부가 타결할 생각이라면 나를 밟고 가야 된다"는 그의 '어록'이 이 과정에서 나왔다. 2002년 대선 경선 당시 정책 노선에선 노무현 후보와 가장 교집합이 많았던 그가 노무현 정부 들어 여권 내에서 가장 대척점에 선 정치인 중 하나가 됐다. 열린우리당 의장 자리에서도, 복지부 장관 자리에서도, 그는 내부의 적과 싸웠다. '왕따'가 되는 수모를 감수하면서도 말이다. 김 고문이 싸웠던 참여정부 말기의 한미FTA 추진 세력에 대해 최장집 고려대 교수는 "신자유주의 엘리트 정치 동맹"이라 규정했다. 그리고 그 "신자유주의 엘리트 정치동맹"이 이명박 정부까지 이어졌고, 서민들의 삶은 더 궁핍해졌다. 2010년 지방선거 때부터 조짐을 보이기 시작해 2011년 몇 번의 선거에서 여실히 드러난 '반MB' 표심은 '1%대 99%'의 사회를 만든 정치권을 포함한 기득권층에 대해 분노한 민심의 반영이다.

▲김근태 고문이 2008년 6월 10일 촛불시위 당시 광화문 청계광장 앞에서 시민들 사이에 섞여 촛불을 들고 있던 모습 ⓒ프레시안(김하영)
그의 빈자리를 채울 정치인이 얼마나 나올 수 있을지 확신하기 힘들다. 대중들의 변화에 대한 열망을 '반MB' 전선을 치고 '1 대 1' 구도를 만들면 자신들의 것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다수의 정치인들을 만나면 더 그렇다. '묻지마 정권교체'를 위해 빠르게 재편되고 있는 정치권이 총선과 대선이라는 두 번의 '난장'을 지난 뒤 변화를 이끈 대중들의 기대와 요구에 부응할 준비가 얼마나 돼 있는지도 의문이다.

김 고문은 생전에 마지막으로 쓴 글을 통해 "2012년을 점령하라"는 말을 남겼다. 정권교체에 대한 열망을 넘어선 '김근태 정신'이 "2012년을 점령"할 수 있을까. 꼭 10년전 있었던 선거를 통해 탄생했던 정권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을까. '선거의 해' 2012년을 이틀 남겨두고 떠난 '정치인 김근태'가 던진 화두이기도 하다.

* <프레시안>은 2012년을 맞아 대선이 끝나는 12월 19일까지 정치팀 기자들이 쓰는 <대선읽기> 연재를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