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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대한민국의 수많은 '김준규'에게 워킹맘이 고함(2011.5.26)

솔직히 25일 김준규 검찰총장의 발언을 뉴스로 접하고 화가 나지도 않았다. 김준규 총장은 전날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초청 특강에서 "남자 검사는 집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집안 일을 포기하고 일하는데, 여자 검사는 애가 아프다고 하면 일을 포기하고 애를 보러간다"고 말했다.

왜? 저게 현실이니까. 제아무리 검사라 해도 애가 아프면 열일 제치고 달려가야 하는 게 육아는 전적으로 엄마 책임인 한국사회의 현실이며, 그걸 보고 여성들의 직업의식 부족을 개탄하는 조직의 수장의 모습 역시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하나도 충격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김 총장의 발언이 크게 뉴스가 되고 많은 이들이 공분하고 이에 검찰총장 측이 '발언의 진의가 잘못 전달됐다'고 진화하고 나서는 상황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좀 음모론적으로 해석하자면 김 총장의 발언을 최초 보도한 게 <조선일보>다. 김 총장이 오는 8월 임기가 끝나는, 게다가 현 정부에서 맘에 들지 않아 간혹 '경질설'이 돌기도 했던 인사가 아니라 '실세 총장'이었다면 과연 이 신문이 문제의 발언을 보도했을까.)

▲ 김준규 검찰총장. ⓒ뉴시스

그래서 솔직히 김 총장 발언을 처음 접했을 때 그러려니 했다. 그런 정도의 편견을 접하는 건 일상이니까. 하지만 세돌 지난 아들이 딸린 일하는 엄마 입장에서 다시 한번 우리사회의 도저히 깨질 거 같지 않은 두터운 '벽'을 절감하며 가슴이 아팠다.

변명삼아 얘기를 꺼내자면, 나 역시 애를 낳기 전까진 김 총장처럼 세상 어떤 일도 회사일보다 중요하지 않은 '워커홀릭'이었다. 누가 시켜서 그런 건 아니었다. 원래 야근을 하고도, 혹은 밤 늦게까지 회식을 하고도 다음날 아침 눈이 번쩍 떠지는 '저주받은' 체력의 소유자인데다, 무엇보다 일이 좋았다. 일하는 것만큼 성취감과 만족감을 주는 다른 무엇이 없었기 때문에 그 시절 그렇게 당연하게 일했다.

그러다 아이를 낳은 뒤 모든 게 변했다. 먹고 자고 싸고 울고 밖에 못하는 작고 연약한 한 생명체의 숨통이 끊어지지 않게 하려면 내 24시간을 쏟아 부어 돌봐야했다. 아이와 같이 먹이고 자고 싸고 달래는 지극히 동물적인 24시간을 보내야했던 나는 한동안 극심한 산후우울증에 시달렸다.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흘렀다. 포대기에 싸여진 애를 아파트 베란다에서 떨어뜨리는 꿈도 꿨다. 공교롭게 당시 산후우울증에 시달리던 한 여성이 자신의 애를 한강에 던지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출산 후 호르몬 변화의 탓이라고 했지만 사실 앞으로 내 삶에 대한 두려움도 컸다. 자신과 일을 위해 24시간을 쓰면서 살아서 타인을 돌보는데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본 경험이 거의 없던 내게 아이란 존재는 두려움 그 자체였다.

육아휴직기간이 끝나서 회사에 복귀하고 3년여의 시간이 솔직히 어떻게 지났는지 까마득하다. 아침에 눈을 떠서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난 늘 분주하다. 특히 집에서 나서서 어린이집에 아이를 데려다 주고 회사로 출근하고 퇴근해 집에 아이를 데려오기까지 시간에 쫓겨 종종거려야 한다. 그나마 친정 부모가 가까이 살아 절반 이상의 육아노동을 분담하는데도 아이와 직장을 병행하는 '워킹맘'의 삶은 너무나 버겁다. 집에서나, 회사에서나, 가족에게나, 직장 동료에게나, 늘 부족한 거 같아 마음이 편치 못하다. 이게 대한민국 대다수 '워킹맘'들의 현실이다.

지난 해 회사 후배들이 '보육정책'에 대한 기획기사를 준비하면서 회사 내 유일한 애엄마인 내게 조언을 구해왔을 때 이런 얘기를 했다. "정부에서 어떤 육아정책을 내놓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본적으로 일하는 문화와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여성들의 출산 파업은 계속될 것 같다." 아이를 믿고 맡길 보육시설도 중요하지만 하루 24시간을 오롯이 회사를 위해 바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고 이런 노동자를 기준으로 업무 평가를 하는 문화와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애엄마 노동자는 직업의식 떨어지는, 조직에 해를 끼치는, '2등 노동자'일 수밖에 없다.

김준규 총장 발언을 둘러싼 논란의 핵심이 돼야 할 지점은 바로 여기다. 김 총장이 시대착오적인 여성관을 가진 인사라는 비판에서 그쳐선 안 된다. 냉정히 말하면 김 총장은 자신이 아플 때 열일 제치고 달려오는 어머니와 자신의 자녀가 아프면 열일 제치고 간호하는 부인 덕분에 그 일을 안 해도 돼서 그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르고 살았을 뿐이다. 그리고 그 연배에, 그 사회적 지위에 있는 남자들 대다수가 김 총장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인식을 하고 있을 것이다.

'24시간 호출 가능' 노동자 인식이 깨지면 여성만 좋은 게 아니다. 애 아픈데도 눈치 보여 달려가지 못하는 남자 노동자들도 마음 놓고 애 보러갈 수 있게 된다. 가족이 애만 있는 건 아닐테니 미혼인 노동자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다.

하나 더 지적하자면 그래도 애 아프다는 소리 듣고 달려갈 수 있는 정규직 엄마들은 그나마 행복하다. 애 아파도 잘릴까봐 달려가지 못하는 비정규직 엄마들의 가슴은 오늘도 시커멓게 타들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