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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화학적 거세, 아버지가 가해자라면 어찌하리오?(2010.6.29)

29일 세종시 수정안에 가려져 별다른 논쟁 없이 통과된, 그러나 상당히 논쟁적인 법이 있다. 만 16세 미만의 아동을 대상으로한 성범죄자의 '화학적 거세'를 주요 골자로 하는 '성폭력범죄자의 성충동 약물치료에 관한 법률안'이다.

조두순 사건 등 최근 아동성폭력 문제가 크게 부각되고 가해자에 대한 강도 높은 처벌을 주문하는 여론이 일자 한나라당이 이 법안을 주도했다. 2008년 박민식 의원이 관련법안을 제출했지만 지지부진하다가 지난 17일 전여옥 의원이 대정부질문에서 "화학적 거세"를 주장하고 맹형규 행정안전부 장관도 이에 동감을 표시하면서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29일 오전 법사위를 통과하고 이날 오후 본회의에 상정돼 재석의원 180명 가운데 137명이라는 압도적인 찬성률을 기록하면서 통과됐다.

유감이다. 당초 화학적 거세를 강하게 주장해오던 의사 출신인 신상진 한나라당 의원처럼 물리적 거세까지 도입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신 의원은 30일 보도자료를 내고 "보다 근본적이면서도 극약처방을 위해서는 물리적 거세로 표현되는 외과적 치료 도입이 신속히 이루어져야 한다"며 아쉬움을 표명했다.

화학적 거세이든, 물리적 거세이든, 아동성폭력 문제가 가해자의 처벌 문제만을 중심으로 법제화되고 논의되는 게 유감이다. 피해 아동의 문제는 정작 뒤로 미뤄지기 때문이다.

60대 발기부전환자도 아동성폭력 상습범이었는데…

아동성폭력 문제를 조금만 들여야 봐도 '화학적 거세'의 실효성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 29일 한나라당이 중심이 돼 화학적 거세를 골자로 하는 아동성폭력 관련법안이 통과됐다. 하지만 화학적 거세가 과연 아동 성범죄를 줄이는데 얼마나 효과적일지는 의문이다. ⓒ연합
기자의 개인적 경험을 먼저 예로 들어보겠다. 지난 2001년 1월 서울 양천구에서 발생한 한 아동성폭력 사건을 취재한 적 있다. 사건의 요지는 자신의 집에 세들어 사는 아동을 성추행해 실형을 선고받은 62세 노인이 그 이후에도 다른 아동을 성폭행했다는 것. 이 사건의 피의자 신모 씨는 지난 99년 9월 자신의 집 1층에 사는 C(7)양과 지하에 사는 K(8)양을 성추행한 혐의로 구속됐다. 신 씨는 K양을 성추행한 사실이 인정돼 2000년 4월 1심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같은 해 12월 2심에서도 동일한 형을 선고받았다. 신 씨는 99년 12월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그 후에도 신 씨는 2000년 4월 "내 딸이 신 씨에게 성폭행 당했다"는 C양 어머니(48)의 신고로 다시 경찰에 연행돼 조사를 받았다. 또 같은 해 9월, 지난 4월 15-19일에 걸쳐 K양, C양, 이들의 친구 Y(7)양, L(7)양을 성추행한 혐의로 경찰에서 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신 씨는 K양을 성추행한 사실 외에 모든 혐의를 부인했다. 그는 자신은 "지난 91년 신장이식 수술을 받은 후부터 병원에서 통원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이며 10년 동안 발기부전이었기 때문에 성폭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C양의 어머니를 무고죄로 맞고소했다. 신 씨는 "그 아주머니 합의금 타내려고 딸 팔아먹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현재는 피해아동의 진술이 법적으로 인정되지만 당시에는 피해아동의 진술이 인정되는 경우가 드물었다. 피해아동과 피해아동 어머니의 진술 이외에 뚜렷한 물증이 없었던 이 사건은 2년 가까운 법적 공방 끝에 신 씨의 성추행 사실이 인정됐다.

대개 아동성폭력은 참을 수 없는 '성적 욕구' 때문이 아니다. 가해자들이 사회로부터 받은 소외와 상처에 대한 분노를 자기방어능력이 떨어지는 아동을 대상으로 분출하는 행위인 경우가 많다. 성적 만족감을 얻기 위한 게 아니라 상대방이 자신의 휘두르는 폭력에 저항하지 못하고 굴복하는 것에 쾌감을 느낀다고 할 수 있다. 또 피해아동들에게 성폭력을 가할 수 있는 수단이 '성기'만은 아니다. 60대의 발기부전환자가 상습적으로 동네 아이들을 상대로 성폭행을 저질렀다는 사실은 이를 입증해준다. 이 발기부전 환자에게 '화학적 거세' 약물이 효과가 있을까? 이미 자연 거세됐는데?

늘어가는 아동 성폭력 가해자

마찬가지 질문을 아동 성폭력 가해자들에게도 던질 수 있다. 2004년 밀양에서 일어난 집단 성폭력 사건, 2008년 대구 초등학생 집단성폭력 사건 등 갈수록 청소년 성폭력 가해자가 늘고 있다. 한국성폭력상담소는 2009년 상담 통계를 분석해 본 결과, "청소년 성폭력 가해자 비율의 증가가 눈에 띄고 있다"며 "청소년 가해자중 공범이 있는 범행이 청소년 강간 피해 건수(준·특수강간, 강간미수·치상 포함 79건)의 15.5%를 차지하고 있다"고 밝혔다. 성폭력 피해자 지원단체에서 공통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경향 중 하나가 성폭력 가해자의 연령이 갈수록 낮아진다는 것이다.

이들 미성년 가해자들에게 화학적 거세 약물을 투입할 것인가? 그럴 수 없다. 29일 통과된 법안에 따르면, 만 19세 이상이라면 화학적 거세 대상이 된다. 초범이라도 죄질이 나쁠 경우 처벌받을 수 있다.

아동성폭력 가해자의 40% 이상이 아버지 등 친인척

마지막으로 가장 민감한 문제를 얘기하고 싶다. 아동성폭력 가해자의 상당수가 부모나 친인척이라는 사실이다. 중앙아동보호전문기관의 2008년 아동성폭력 상담 자료에 의하면, 아동성폭력 가해자의 47.4퍼센트가 부모나 친인척이었다.

범위를 전체 성폭력으로 넓혀도 부모를 포함한 친족에 의한 성폭력은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2009년 한국성폭력상담소에 접수된 성폭력 상담 1338건 중 성폭력 피해자가 면식범인 경우가 85퍼센트(1137건)였고, 이중 친족(친인척)에 의한 성폭행은 17.7퍼센트(201건)에 달했다.

최근 온국민을 분노하게 만들었던 아동성폭력 사건처럼 생면부지의 괴한이 아이를 납치해 성폭행하는 일보다 훨씬 많은 게 가족 내에서 발생하는 아동성폭력이다. 친인척이 가해자일 경우 피해아동은 가족 내 역학관계 때문에 피해 사실을 외부에 알리기가 더 힘들다. 실제 알려진 친족에 의한 성폭력은 수년간에 걸쳐 오랫동안 가해가 지속된 사례가 대부분이다. 아버지를 화학적 거세하는 방법으로 과연 이런 일이 얼마나 줄어들 수 있을까?

가해자에 대한 분풀이보다 시급한 건 피해아동에 대한 지원

그래서 어쩌자는 얘기냐고? 현재 화학적 거세법안만 덜렁 통과됐을 뿐 어떤 약물을 사용할지, 거세 대상자를 어떤 방식으로 관리할지, 약물 투여를 중단할 경우 오히려 일시적으로 성적 욕구가 증가하는 등 부작용은 어떻게 할지, 약물 투입 비용은 어떻게 감당할지 등 세부적인 문제는 결정되지 않았다.

해외에서 전량 수입해야 하는 화학적 거세 약물은 1회 약물 투입에 약 300만 원의 비용이 들어간다고 한다. 이 돈을 차라리 피해아동의 신체적, 정신적 치료를 지원하는데 쓰자. 앞에 언급한 양천구에서 발생한 성폭력 사건에서도 피해아동은 성폭력을 당한 뒤 '외상후증후군'으로 고통을 겪고 있었다. 피해아동의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합의금 타내려는 것"이라는 억울한 누명까지 써 더 고통스러워했다. 하지만 이들 모녀는 2년 동안 소송이 끝날 때까지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했다. 가해자에게 폭행을 당해 얼굴이 부서지고 장기가 손상되어도 현재 배상명령 제도에는 성폭력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피해 후 1년간 300만 원까지 지원되는 성폭력 피해자 의료비 정도가 유일한 지원책이다. 이런 지원금마저 지원대상 선정이 까다로워 받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사후적 치료 말고도 절실한 피해아동에 대한 지원은 무수히 많다. 현재 턱없이 부족한 아동성폭력 상담 및 지원센터를 늘리고, 아동성폭력 전담 수사인력을 보강하는 일도 필요하다.

또 단순한 CCTV 설치가 아니라 24시간 모니터 인력을 두고 긴급 상황이 발생할 경우 바로 출동할 수 있는 긴급구호시스템을 만드는 등 아동성폭력 예방을 위한 법제도의 마련도 시급한 과제다.

강력한 처벌을 하지 말자는 얘기가 아니다. '화학적 거세'라는 선정적인 방법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처벌을 강화할 수 있다. 성폭력 범죄의 기소율이 41.3퍼센트에 그치고, 성폭력 범죄 1심 재판 실형률이 41.2퍼센트에 그친다는 사실을 볼 때, 검찰과 사법부가 엄격한 처벌 기준을 적용하는 게 먼저라고 본다.

하나만 더 얘기하자면, 성폭력으로 인한 고통은 아동만의 문제가 아니다. 만연한 아동성폭력은 만연한 어른 성폭력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