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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박근혜를 지키는' 넌, 누구냐? (2010.6.28)

28일 오전 10시30분. 국회 공식브리핑 장소인 정론관엔 희한한 병풍이 쳐졌다. "박근혜를 지키겠습니다"라는 캐치프레이즈가 적힌 대형 병풍을 치고 이성헌 한나라당 의원이 내달 14일에 있을 전당대회 출마 선언을 했다. 야심차게 준비한 전당대회 출마선언이었지만, 이성헌 의원은 국회 로고를 가린 '박근혜 병풍' 때문에 한때 마이크가 꺼지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공교롭게도 이날 기자회견장 배경이 교체됐다. 국회 사무처에서 새 국회 로고를 가리고 기자회견이 불가능하다면서 마이크를 꺼 한동안 이성헌 의원 측과 실랑이가 오갔다.

2008년 총선의 추억 '박근혜 분신술'

▲ 국회 로고를 가리는 대형 '박근혜 병풍'을 치고 전당대회 출마선언을 하는 이성헌 의원. ⓒ연합
당 대표 선거에 나서면서 자신의 이름이 아닌 '박근혜'를 전면에 내세운 이성헌 의원의 출마 선언을 보면서 지난 2008년 총선에서 연출됐던 웃지 못할 풍경이 떠올랐다. 당시 정당이 아니었던 친박 무소속연대의 후보들은 하나 같이 "기호 6(7)번 박근혜입니다"라고 유권자들에게 자신을 소개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박근혜 후보'가 분신술을 쓰는 홍길동도 아닌데 여기저기 동시에 출마한 것으로 오인 받을 상황이 연출됐다. 정작 본인은 자신의 지역구인 대구 달성에 출마했는데 말이다. 분신술을 쓰는 '박근혜 후보'의 활약은 놀라웠다. 창당 20일이 된 급조된 신생정당이 지역구 5명, 비례대표 8명이라는 놀라운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비례대표 1,2,3번이었던 서청원, 양정례, 김노식 전 의원이 '공천헌금 파동'으로 당선무효형을 받는 등 적잖은 파동이 있었다. 당 이름을 미래희망연대로 바꾸고 친박연대는 '박근혜 정신'을 이어받기 위해 서울 마포구 창전동에 천막당사를 마련하기도 했다. 이미 소속정당과 의원직이 무관한 지역구 의원들은 한나라당으로 당적을 바꾼 미래희망연대는 지난 4월 첫 전당대회에서 한나라당과 합당을 만장일치로 추인했다. 금배지를 지키고자 당명을 어렵사리 지킨 미래희망연대는 당 대 당 합당으로 2년간 파란만장한 역사를 마무리할 전망이다.

2년 만에 반복되는 '박근혜 지키기'

표면적으로 드러난 일만 보면 '친박연대'의 존재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성숙된 민주주의에서 특정인의 이름을 전면에 내세운 정당, 특정인을 지키는 것을 당의 지상과제로 내세운 정당의 존재는 납득하기 힘들다. 하지만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 이후 권력을 잡은 친이(명박)계의 정치 행태를 보면 심정적으로 이해는 할 수 있는 일이다. 승자가 패자를 상대로 휘두르는 '복수의 칼날'은 패자 입장에선 잔인하고 야비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떨어져 나온 게 '친박연대'였다.

그로부터 2년이 흘렀다. 하지만 한나라당 내부 사정은 크게 바뀐 게 없다. 2008년 총선에서 친박연대가 거둔 성과가 의미하는 바는 한나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박근혜 전 대표가 가진 지분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지지계층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친이계는 선거 결과가 의미하는 바를 무시했다. 친박연대로 조금 '흠집'이 나긴 했지만 압도적으로 이긴 선거였다. 정권 초기 권력을 분점할 이유는 없었다.

2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이 대통령과 친이계의 힘은 서서히 빠졌다. 독단적 국정운영이 주된 요인이었다. 이런 행태를 가져온 근본원인은 독점적 국정운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빠진 힘을 보충하기 위해 박근혜를 끌어안을 생각은 전혀 없다. '박근혜'는 여전히 권력의 정점으로부터 탄압받는 피해자의 이름이며, 그래서 지켜야할 명분이 있는 '정의'의 이름이다.

심지어 이명박 대통령과 청와대, 그리고 친이계 의원들은 6.2 지방선거 참패 이후에도 크게 변화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지난 14일 이 대통령이 직접 TV 생중계 연설을 통해 "민심을 무겁게 받아들이겠다"면서 "세종시 수정안 문제를 국회에 맡기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세종시 수정안이 상임위원회인 국토해양위에서 부결된 이후에 청와대와 친이계는 본회의에 상정하겠다면서 고집을 부리고 있다. 본회의에 상정되더라도 통과될 가능성이 낮은데도 고집을 버리지 않는 이유에 대해 박근혜 전 대표를 겨냥한 것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박근혜'의 이름으로 세종시 수정안을 부결시키겠다는 의도라는 분석이다.

박근혜, 'MB 내리막길'에 동승할 것인가

2년 만에 다시 등장한 '박근혜 지키기'의 명분은 '2012년 정권재창출'이다. 지난 지방선거 패배 직후에도 마찬가지였고 한나라당 내에서 '쇄신' 요구가 나올 때마다 '박근혜'가 등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박근혜 전 대표는 현 권력의 대척점에 서 있는 사람이고, 그래서 이명박 대통령이 아닌 다른 무엇을 사고할 때 가장 먼저 등장한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박 전 대표는 이명박 대통령이 권력의 정점에 있기 때문에 상종가를 칠 수 있었다. 한나라당은 6.2 지방선거에서 졌고 7.28 재보선 전망도 밝지 않다. 여전히 청와대가 당을 크게 좌지우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7.28 재보선 결과도 오롯이 이 대통령이 책임져야 한다. 7월 재보선에서도 지고 8월25일 임기 반환점을 돌게 되면, 이 대통령에겐 이제 오르막길보다는 내리막길이 기다리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박지원 민주당 원내대표는 28일 MBC라디오 <손석희 시선집중>과 인터뷰에서 "역대 정권이 다 그런 양상을 보였고 이명박 정권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 대통령이 내리막길을 탄다고 박 전 대표가 자동으로 오르막길을 타게 되는 것은 아니다. 6.2 지방선거에서 확인된 '반MB' 민심은 그저 이 대통령에 반대하는 정치인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이명박 정권이 보여준 여러 가지 반민주적인 모습과 경제대통령을 내세워 당선됐지만 4대강 건설 등 '삽질경제' 이외에 정작 대다수 국민들이 원하는 민생경제는 외면하는 모습에 실망했다고 보는 게 맞다.

박 전 대표가 과연 이런 국민들의 기대에 부합하는 모습을 보여줬는가? 세종시 수정안 등을 통해 박 전 대표가 보여준 모습은 '원칙 있는 정치인'이다. 멀리갈 것 없이 세종시 문제에 있어 대선 때 약속을 뒤집었던 이 대통령과는 분명 다른 모습이다. 하지만 나머지 자질에 대해선 검증이 되지 않았다는 게 솔직한 평가일 것이다. 2006년 지방선거 유세 도중 '커터칼 테러'를 당한 뒤에 남긴 "대전은요?"라는 한 마디가 많은 대중들의 뇌리에 남아 있듯 박 전 대표의 '단답형 정치'로 유명하다. 정말 필요한 순간에 메시지가 될만한 한 마디 이상의 말은 그에게 기대하기 힘들다. 그러다보니 박근혜 전 대표만큼 대중적 인지도와 인기가 큰 정치인이 없지만, 그만큼 실체가 잘 알려지지 않은 정치인도 드물다. 나쁘게 얘기하자면 신비주의 전략을 쓰는 것이고, 더 나쁘게 해석하는 이들은 그만큼 콘텐츠가 없는 게 아니냐는 얘기도 한다.

앞으로 2년 반 박 전 대표가 이 대통령의 내리막길에 동승할 것이냐, 아니냐를 가르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박근혜를 지키겠다"는 친박계 의원들의 주장이 단순한 '무임승차'가 아닌 진정성을 가진 것이냐도 이런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