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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워런도 중도 하차...'바이든 대 샌더스' 압축

[2020년 美 대선 읽기] 70대 백인 남성 후보만 남았다

"내 어머니는 시어스 백화점의 노동자였습니다. 내가 정치를 하는 이유는 바로 내 어머니와 같은 노동자들을 위해서입니다."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이하 직함 생략)은 지난 3일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에서 열린, 어쩌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를, 대선후보 유세에서 자신과 가족들의 삶에 대해 담담하게 이야기를 하며 자신이 정치를 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진보 후보' 워런이 정치를 하는 이유

워런은 2011년 매사추세츠 최초의 여성 상원의원이 되기 전, 파산법 전문가로 하버드 대학교 교수 등을 역임했다. 2008년 금융위기 발생 이후 워런은 미국 재무부 금융구제프로그램(TARP)을 감독하기 위해 창설된 의회 조사위원회 위원장을 지냈고, 이후 오바마 정부에서 소비자금융보호국에서 일했다. 금융위기 당시 피해자의 편에 서서 금융자본의 악랄한 행태를 고발하고 맞서 싸운 워런의 활동은 큰 찬사를 받았고, 2009년 타임지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선정됐다. 워런은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자본주의 : 러브스토리>에 출연해 월가의 부정부패를 고발하기도 했다.  

하지만 워런은 이런 화려한 이력을 좇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경험하고 목격한 미국식 자본주의의 모순을 뜯어 고치기 위해 정치를 하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이날 유세만이 아니라 저서 등을 통해 워런은 자신이 미국 중산층의 성장과 몰락을 얼마나 처절하게 경험하고 목격했는지 강조해왔다.  

워런은 1949년 오클라호마주에서 태어났는데, 어린 시절 아버지가 갑자기 심장병으로 쓰러지면서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집까지 빼앗긴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워런의 어머니는 시어스 백화점에 점원으로 취업을 했다. 그의 어머니는 당시 최저임금에 해당하는 저임금을 받았지만, 1950-60년대 경제 부흥기를 맞은 미국 사회에서 노동자들은 임금 만으로도 넉넉하지는 않지만 먹고 살 수 있었다고 한다. 19살에 대학을 중도에 포기했던 워런은 결혼 후 장학금을 받고 다시 공부를 시작해 대학 교수가 될 수 있었다. 

워런은 정치인이 되고 나서 <이 싸움은 우리의 싸움이다>(This Fight is Our Fight)라는 책을 통해 미국 사회에서 중산층이 어떻게 무너지고 있는지 고발했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모기지 대출을 받아 집을 샀다가 은행에 돈을 갚지 못해 집을 빼앗긴 사람들은 공교롭게도 흑인들이 절대 다수였다. 한 20대 여성은 학자금 대출을 받아 자신이 원하는 사립대학에 진학했지만, 대학 자체의 비리가 터지면서 그가 등록한 학위 과정 자체가 사라졌고, 4만5000달러의 학자금 대출만 갚아야할 형편이 됐다. 1970년 대비 2015년 미국 대학 등록금은 245% 증가했다. 당시 학자금 대출 규모는 1조5000억 달러로, 대학 졸업자들이 평균 4만 달러의 빚을 지고 사회 생활을 시작하고 있었다. 워런은 자신이 교수로, 정부 관료로, 정치인으로 만났던 수많은 피해자들의 사례에 깊이 공감하고 분노하면서 시급히 해결책을 찾아야할 정치적, 정책적 과제들이 무엇인지 역설해왔다. 워런은 "미국은 누구나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일하면 성공할 수 있는 기회의 땅이었다. 그 미국이 사라지고 있다. 내가 가졌던 그 기회, 싸울 기회를 우리 아이들에게도 주기 위해 난 싸우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현실 정치의 '벽'은 이런 '진정성' 만으로 깰 수는 없었다. 버락 오바마를 미국 최초 흑인 대통령으로 만들었던 진보성향의 전략가들은 2016년 '여성 대통령' 후보감으로 사실 힐러리 클린턴이 아닌 엘리자베스 워런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클린턴과 그를 지지하는 민주당 주류 쪽에서 이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이들은 워런을 집요하게 만나고 설득해 대선에 나가지 않게 만들었고 2016년 민주당 경선에서 지지 선언까지 받아냈다.  

워런은 2020년 대선 후보로 도전장을 냈지만, 샌더스와 차별성을 보이는데 실패했다. 그는 진보진영 유권자들의 '원픽'이 되지 못하고 5일 중도 하차를 선언했다. 워런은 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시장의 성희롱 의혹 등을 폭로하는 등 존재감을 드러냈지만, 막상 경선에서는 한번도 3위 이상의 성적을 기록하지 못했다. 지난 3일 있었던 ‘슈퍼 화요일’ 경선에서 워런은 자신의 지역구인 매사추세츠에서도 바이든과 샌더스에게 밀려 3위를 기록하는데 그쳤다.

워런 사퇴로 70대 백인 남성 후보들만 남은 2020년 대선

워런은 5일 선거캠프를 통해 중도하차 입장과 바이든과 샌더스 중 어느 후보를 지지할 지는 아직 결정하지는 못했다고 밝혔다. 4일 블룸버그가 하차하면서 바이든 지지 입장을 밝힌데 이어 워런까지 사퇴하면서 이제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은 사실상 중도를 대표하는 바이든 대 진보를 대표하는 샌더스의 싸움으로 압축됐다. 털시 개버드 하원의원이 남았지만 미미한 지지율로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워런의 사퇴 소식에 카멀라 해리스 상원의원은 이날 CNN과 인터뷰에서 “이제 여성을 대표하는 대선 후보가 아무도 없다”고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해리스도 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였지만 중도 사퇴했다.  

워런이 사퇴하면서 민주당 경선 뿐 아니라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 자체가 70대 백인 남성 후보들이 경쟁하는 장이 됐다. 바이든은 77세, 샌더스는 78세이며, 재선에 도전하는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73세다. 2016년 대선에서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가 트럼프에게 지면서 좌절됐던 ‘여성 미국 대통령’의 꿈은 2020년에 다시 4년 뒤로 미뤄지게 됐다.

▲ 지난달 29일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지지자들을 만나고 있는 엘리자베스 워런 의원.ⓒ김동석 미주한인유권자연대 대표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