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은 지켜질 때만 의미가 있다. 지키지는 않으면서 그저 보기에 좋기 때문에 명분상 내세우는 것을 '원칙'이라고 할 수는 없다. 아니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지키지 않는 '원칙'을 내세우는 게 겉보기엔 그럴듯할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신뢰를 잃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노무현 정부는 앞으로 여성 등 사회적 약자를 정부 요직에 중용하는 균형인사를 '원칙'으로 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이른바 균형인사는 정치적 코드, 차기 대권주자들에 대한 배려, 지역 안배 등 정치적 변수에 늘 뒤로 밀려 지켜지지 않는 '원칙'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31 지방선거에 출마시키기 위해 지난 17대 총선 영남지역 낙선자를 개각에서 우선 배려하기도 하면서 여성장관 후보들은 "2% 부족하다"는 이유로 배제하는 현 정부가 균형인사를 '원칙'으로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보기에 좀 민망하다.
***청와대 "여성장관 후보, 한두 가지씩 기대치에 모자라"**
노무현 정부 출범 당시 20명의 국무위원 중 4명이 여성이었다. 역대 최대 여성장관이었다. 그러나 현재 20명의 국무위원 중 여성은 장하진 여성가족부 장관 1명에 불과하다.
좀 더 명확히 하자면 노무현 정부 들어 여성장관은 강금실 전 법무장관, 한명숙 전 환경장관, 김화중 전 복지장관, 지은희 전 여성장관 등 출범 당시 4명과 장하진 장관이 전부다. 국무위원이 아닌 장관급 관료 중엔 김선욱 법제처장이 유일하다.
차관급으로 가면 여성 비율은 더 줄어든다. 각 부처의 차관은 한 명도 없고 최영애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정강자 상임위원, 최영희 청소년위원회 위원장 등 3명이 차관급 관료다.
15일 발표된 새 환경장관 내정자도 당초엔 여성을 중용하겠다고 밝혔으나 결국은 남성이 됐다.
김완기 청와대 인사수석은 당초 여성을 발탁하겠다는 기조가 바뀐 이유에 대해 "지금까지 접촉하고 추천받아 검토해본 (여성 후보)분들이 8명 정도 되는데 우리 정부가 기대하는 어떤 요소들과 부합되지 않는 게 한두 가지라도 있으면 곤란하다 이렇게 판단했다"고 해명했다.
청와대가 3월 2일 행자부 등 4개 부처 개각 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결정한 신임 환경부 장관 내정자는 이치범 환경자원공사 사장이다.
그는 물론 환경운동연합 사무처장, 고양환경운동연합 공동의장, 한국환경사회정책연구소장 등의 경력을 가진 환경운동가 출신이라 '전문성'이라는 점에선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청와대가 검토한 8명의 여성 후보군 중에 포함된 것으로 알려진 박은경 환경정의시민연대 공동대표, 김상희 지속가능발전위원장 등도 환경운동가 출신으로 정부의 정책자문위원도 지낸 전문가들이다. 현 정부에서 환경부 차관을 지낸 박선숙 전 차관도 후보 중 한 명으로 검토됐으나, 청와대 관계자는 "2% 부족하다고 판단했다"고 전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 청와대 공보수석을 지내기도 했던 박 전 차관은 김대중 정부와의 관계를 고려해 차관으로 발탁됐다가 다시 정치적인 이유로 배제된 셈이다.
***여성 후보들에게 부족한 2%는 뭘까?**
이치범 내정자는 지난 2002년 고양환경운동연합 의장으로 있을 때 시민단체들의 추천을 받아 고양시장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낙선한 바 있다. 이어 2002년 말 대선에서 노무현 캠프에 결합해 노 대통령 시민사회 특보를 지냈다. 그는 현 정부 들어 환경자원공사 사장이 됐다. 그는 또 노무현 정권 탄생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정부 산하단체에 진출한 인사들의 친목 모임인 '청맥회' 회장을 지냈으며 현재도 고문으로 있다. 청맥회는 현재 회원이 134명으로 분기에 1번 꼴로 모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대 철학과 출신인 이 내정자는 이해찬 전 총리, 이재용 환경부 장관과도 친분이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 내정자가 소장으로 있던 한국환경사회정책연구소는 이해찬 전 총리가 2002년 구입했다가 문제됐던 대부도 땅 300평을 임차하고 있는 상태다.
이치범 내정자의 이같은 전력에 대해 김완기 인사수석은 "저는 알았으나 대통령은 몰랐다"는 수긍하기 힘든 해명을 했다.
이러니 야당에선 당장 '코드인사' '보은인사'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한나라당 이계진 대변인은 "'코드 인사'에 대해 장관 인사청문회에서 확실하게 따지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 내정자의 자질은 앞으로 더 따져봐야 할 문제다. 그러나 8명이나 되는 여성 후보들을 "2% 부족하다"며 모두 내친 뒤 택한 이 내정자가 이 같은 정치적 논란이 충분히 예상되는 인사였다는 점은 씁쓸하기만 하다.
***여성장관 발탁에도 '역발상'?**
김완기 인사수석은 이번에도 여성장관이 배제된 것과 관련해 "여성장관은 앞으로 남성의 독무대로 여겨져 왔던 분야에서 발탁하는 게 의미가 크겠다고 방향을 선회했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의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부 장관이나 일본의 가와구치 요리코(川口順子) 전 외상 등을 거론하면서 "예를 들어 건설교통부 장관을 여성도 할 수 있지 않겠냐"며 "환경부와 복지부의 경우 여성장관이 꼭 가야 하는 부처인 것처럼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고 덧붙였다.
노 대통령의 특기인 '역발상'을 여성장관 임명에도 활용하겠다는 뜻인가? 노 대통령은 지난 2005년 여성지도자 신년인사회에서 "여성장관을 출범 당시의 수준으로 회복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이 약속을 한 지 벌써 1년이 지났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아마 청와대에서 여성장관 후보를 검토하면서 부족하다고 느꼈던 '2%'는 아마 조직 및 행정경험, 리더십, 정치적 감각 등일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 열거한 점들은 현재 장관직을 수행할 만한 40-50대 여성이 한국 사회에서 쉽사리 얻기 힘든 자질이다. '여성할당제'를 도입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남성중심 사회에서 여성과 남성이 첫 출발점부터 다르므로 단순한 '기회의 평등'이 아닌 '결과적 평등'을 보장해줘야 현재의 불균형을 바로 잡을 수 있다.
이처럼 사회적 차별의 결과가 개인의 자질 부족으로 나타나는 문제를 노 대통령은 이재용 전 환경장관 등 영남지역 낙선자를 중용하면서 지적한 바 있다. 노 대통령은 당시 "내가 몸담았던 정당은 영남에서 지지가 없다보니 사람들이 들어오지 않고 그러다보니 선거 때가 되면 인물이 없다는 소리를 듣는다"며 "이렇게 악순환이 되다 보면 지역구도는 더욱 굳어지게 마련이다. 원외인사 기용은 지역구도 극복이라는 간절한 목표를 실천하는 과정의 하나"라고 항변했다.
이처럼 노 대통령은 평소 중요하게 생각했던 '지역구도'와 관련해서는 불균형의 문제를 간파하고, 이를 바로 잡기 위해 정치적 비난도 감수하고 영남지역 낙선자들을 정부 요직에 기용했다. 물론 일부는 5.31 지방선거를 맞아 내 보내기는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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