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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노무현

‘현실 정치인’ 노무현의 고민 (2002. 5.10)

민주당 대선후보 노무현의 고민이 깊다. 

김영삼(YS) 전 대통령이 9일 민주당 노무현 후보의 부산시장 후보 천거요청을 사실상 거절했다. 민주당 대선 후보로 확정된 후 첫번째 정치적 행보였던 YS와의 회동에서 노 후보는 결국 의도했던 바를 이루지 못했다.

YS는 노 후보 측이 YS의 대변인격인 박종웅 한나라당 의원을 시장후보로 영입하려 한 것에 대해 "부산 여론이 좋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부정적인 입장을 밝혔다. 

이같은 입장 정리는 부산지역 민심이 민주당 측에 결코 유리하지 않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퇴임 후 가장 몸값이 올라있는 YS는 승산 없는 게임에 개입할 이유가 없다. 

YS는 부산시장 추천거부 이유를 노 후보의 문제가 아닌 김대중 대통령의 문제로 돌림으로써 지방선거 이후 노 후보와의 협력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았지만 이번 결정으로 노 후보의 신민주대연합이 급진전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현실 정치인' 노무현, 부산시장 후보로 한이헌씨 내정**

"나도 현실 정치인이다. 과오있는 사람은 아무도 만나지 말라고 하면 김대중 대통령도 당을 떠나는 마당에 누구와 정치를 하란 말이냐."

YS와의 회동에 대한 비난 여론에 대한 노무현 후보의 항변이다. 

노 후보는 아울러 "민주, 개혁, 통합 등 국가적 과제를 수행할 정치적 주체세력을 만들어야 한다. 과오도 반역에 해당하는 과오가 있고 그냥 과오가 있다"면서 YS와의 연대 의지를 거듭 밝혔다. 또 "결국 국민도 내가 정치하는 사람이란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런 맥락에서 노 후보는 민주당 부산시장 후보로 한이헌 전 청와대 경제수석을 선택했다. 본인의 고사도 있었지만 부산 민변 회장을 지낸 문재인 변호사가 아닌 한씨를 부산시장 후보로 내정한 것은 YS와의 관계 때문이다. YS 재임시절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낸 'YS 사람' 한씨를 공천함으로써 관계의 끈을 계속 붙들어 두려는 포석이다. 한씨는 후보로 내정된 뒤 "김영삼 전 대통령도 마음으로 격려할 것"이라고 말했다.

과연 노 후보의 바람대로 국민들이 '현실 정치인'으로서 노 후보의 입장을 이해하고 있을까? 현재까진 '그렇다'고 말하기 힘들다. 

***YS와 회동 이후 "정계개편 반대" 60%**

노 후보와 YS의 회동 이후인 지난 6일 한국일보와 미디어리서치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노 후보의 YS 예방 및 협조 요청에 대해 응답자의 60.8%가, 신민주연합 정계개편론에 대해서는 61.7%가 각각 '잘못한 일'이라고 대답했다. 

한달 전인 4월 3일 국민일보와 월드리서치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노 후보가 이념과 정책 중심의 정계개편을 추진하겠다는 발언에 대해 61.8%가 바람직하다고 응답했던 것과는 정반대 결과다. 찬성 60% 이상이 반대 60% 이상으로 역전됐다. 국민이 바라는 정계개편은 노 후보가 YS를 찾아가 YS로부터 예전에 받은 시계를 보여주고, 부산시장 후보 낙점을 부탁하는 방식의 정계개편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와의 양자 대결에서 노 후보의 지지율도 급락했다. 노 후보는 지난 6일 한국일보 여론조사에서 44.7%의 지지를 얻어 36.7%의 이 후보를 8% 포인트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같은 한국일보 3월27일자 조사의 양자 대결 때 17.1% 포인트, 3자 대결 때 11.8% 포인트 차이로 노 후보가 이 후보를 앞섰던 데 비해 크게 줄어든 것이다. 

왜 지지율이 급락했을까? 국민들은 노무현 후보의 '현실 정치인'과는 차별화된 모습에 기대를 걸었기 때문이 아닐까? 

민주당 국민경선제를 통해 태동한 '노풍'은 '국민들의 변화와 개혁에 대한 열망'에 기반한 것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기존 정치인과는 차별화된 모습을 통해 '탈권위' '반부패' '탈지역주의' '철새정치 거부' 등을 포함하는 정치적 변화를 바라는 대중의 열망이 노무현 후보에게 집중될 수 있었다는 것. 

그러나 "영남권 지방선거에서 패하면 후보재신임을 받겠다"고 공언한 노 후보로서는 대표적 구시대 정치인인 YS와의 연대를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지방선거를 떠나 대선 전략으로도 영남권 표심을 잡기 위해 YS와의 연대는 중요하다. 아직까지 지역주의가 영향을 미치는 유권자들의 투표행태를 볼 때 노 후보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일지 모른다. 

노 후보는 9일 인천 실내체육관에서 열린 '민주당 인천지역 지방선거 필승 결의대회'에서 자신의 지지도 하락 조짐에 대해 "약간 지지율이 빠져 자세히 분석해 봤더니 본디 바람 따라 좀 왔다갔다 하는 분들이 요즘 약간 한 발짝 물러섰을 뿐, 확실히 민주당과 저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만큼 노풍은 끄떡없다"고 주장했다.

***한국노총 "개혁 열망 담아낼 정당 창당하겠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노풍'의 배경이었던 정치개혁 열망과는 달리 노 후보가 지방선거 승리를 위해 YS와의 연대에 매달리거나, 민주당이 구시대적인 지역주의 선거공학에 집중할 경우 '노풍'이 급속히 꺼질지 모른다는 목소리가 높다. 

한국노총은 지난 7일 중앙정치위원회를 열어 "보수화하고 있는 현 정치권의 정계개편은 민주당 국민경선 과정에서 나타난 국민들의 개혁열망을 담아내는 데 많은 한계를 보이고 있다"면서 "정책과 이념을 기준으로 하는 '개혁적 국민정당' 창당을 제 민주사회단체 및 각 정당에 제의하겠다"고 결정했다. 

한국노총 우태현 정치국 차장은 "지방선거가 끝난 뒤 개혁정당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할 계획"이라며 "개혁에 동의하는 모든 사회단체, 정당뿐 아니라 기존 정치인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직 한국노총의 '개혁적 국민정당' 창당 움직임이 연말 대선 때까지 가시화된 성과를 나타낼지 미지수다. 그러나 '노풍'으로 표현되는 정치개혁 열망이 기존의 정치 구도에 흡수되는 것에 대한 일종의 저항 움직임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정치 구도와 민심의 흐름 속에서 노무현 후보는 '현실 정치인'으로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나. 앞으로 8개월 남은 대선 기간 내내 노 후보가 풀어야 할 숙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