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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박근혜

박근혜는 '여자'다! (2012.11.1)

사회에서 개인은 복수의 정체성을 갖는다. 사회가 분화, 발전함에 따라 개인의 정체성도 다양해질 수밖에 없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며, 서울에 거주하는, 30대 후반, 직장을 다니고, 한 자녀를 둔, 기혼, 여성이다. 이 간략한 설명에 빠진, '나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사회적 접점은 숱하게 많다.

박근혜, '첫 여성 대통령'?

그런 이유로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오는 12월 19일 대선에서 승리한다면 대한민국 헌정 사상 '첫 여성 대통령'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단순히 '생물학적인 여성'이기 때문에 '여성 대통령'이라는 의미 부여가 과도하다는 반론이 나온다. 이번주 내내 뜬금없이 여야 간에 '박근혜는 과연 여성 대통령이냐'라는 공방이 오갔다.

발단은 박근혜 후보 발언이었다. 박 후보는 지난 주말 김성주 공동선대위원장이 주최한 '대한민국 여성혁명 시대 선포식'에서 "여성 대통령이야말로 가장 큰 변화, 쇄신"이라고 주장했다. 정몽준 공동선대위원장, 이상일 대변인 등도 29일 박 후보의 이같은 주장에 동조하며 '여성대통령론'에 힘을 실었다. 31일 안형환 선대위 대변인도 "여성대통령이 나오는 것은 선진국에서 보더라도 역사의 진보"라고 거듭 강조했다.

민주당 문재인 후보 측은 발끈했다. 정성호 당 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박 후보는 출산과 보육 및 교육, 장바구니 물가에 대해 고민하는 삶을 살지 않았다"며 "박 후보에게 '여성성'은 없다"고 반박하고 나섰다. 정 대변인은 "박 후보는 전체주의적이며 폐쇄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박정희식 정치의 계승자"라면서 "남성성을 가진 박 후보가 대통령이 되는 것은 그래서 쇄신과 변화라고 말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박광온 후보 대변인은 한발 더 나아갔다. 박 대변인은 "박 후보는 박봉과 임금 차별로 힘겹게 일하는 직장여성의 애환을 체험해 본 적도 없고, 가정주부의 삶도 모른다. 오로지 공주로서 떠받들어지는 삶만을 살았을 뿐"이라면서 "박 후보를 규정하는 것은 여성의 정체성이 아니라 공주의 정체성, 귀족의 정체성, 특권의 정체성"이라고 비난했다.

ⓒ연합뉴스

2007년 대구 민심 "근혜야, 오빠 먼저!"

2007년 한나라당의 대선 경선 당시 대구가 고향인 한 후배 기자가 고향 민심을 전해왔다. 한 마디로 "근혜야, 오빠 먼저!"였다는 것. 남자이자 연장자인 이명박 후보가 먼저 대통령이 돼야 한다는 게 보수 정당인 한나라당의 정치적 기반인 대구경북지역의 민심이었다고 한다.

크게 개선됐다고 하지만 여전히 유교적 가부장제 문화가 지배하는 한국 사회에서 단지 생물학적인 의미로 '여성 대통령'의 탄생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사회 구성원 다수의 실질적 인식 변화를 이끌어내는 있는 것은 구체적인 현실이다.

박근혜 후보가 야당이 주장하듯 겉껍데기만 '여성'일지라도, 그 '여성'이 실제 대통령으로 매일 국민들 눈앞에 등장하는 것은 우리사회에 여전히 존재하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 금기'를 깨는 일임에 분명하다.

과거 김대중 정부에서 헌정 사상 처음으로 국무총리 후보자로 여성을 지명했을 때 우리사회가 보였던 반응을 되짚어 보면 '겉껍데기 여성'이라도 고위직에 오르는 것의 의미가 얼마나 큰 지 알 수 있다. 당시 김대중 정부의 대척점에 섰던 보수 언론은 일제히 반기를 들고 나섰다. 특히 당시 한 보수신문 만평은 우리사회에서 첫 여성 국무총리 후보자 탄생의 의미를 (보수적) 남성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잘 보여줬다. 대통령제에서 총리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인데, 여성 총리의 경우 위에 있는 '1인'이 과연 대통령이냐, 남편이냐를 묻는 그림이었다. 야당의 반발로 안타깝게 당시 첫 여성 총리 후보자였던 장상 전 이화여대 총장은 낙마하고, 첫 여성 총리 탄생은 노무현 정부로 미뤄졌다. 노무현 정부에서 여성 총리가 일하는 걸 실제 현실로 경험한 다수의 국민들은 더 이상 '총리의 남편'의 지위에 대해 묻지 않는다.

독재자의 딸, 보수정당의 여성후보

따라서 박근혜 후보가 당선될 경우 '첫 여성 대통령'이란 의미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는 동의하기 어렵다. 박근혜는 '여자'다. 특히 민주당 쪽에서 "박근혜는 여성성이 없다"며 내세운 논리는 오히려 민주당이 '여성'에 대해 얼마나 편협한 사고를 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출산과 보육 및 교육, 장바구니 물가에 대해 고민하는 삶"이 '여성'의 삶이란 인식이야말로 여성의 역할을 가정주부, 어머니에 국한하는 퇴행적 인식이다. '애도 안 낳아본 여자'라는 이명박 대통령이 2007년 대선 후보 경선 당시, 또 올해 새누리당 대선 경선을 앞두고 이 대통령의 최측근인 이재오 의원이 한 발언과 뭐가 다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 대통령 후보로서 박근혜 후보가 갖는 한계는 분명하다. 박 후보에겐 '여성'으로서 정체성이 취약한 건 사실이다. 박 후보가 대선 후보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 주요 동력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란 점은 누구도 부인하기 힘들다. 박 후보 스스로도 정치를 시작한 이유로 '아버지'를 꼽았다. 2007년 대선 경선에서 한번 겪고도 이번 대선에서 또다시 인혁당, 정수장학회 등 과거사에 대한 왜곡된 발언을 내뱉는 것은 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그래서 박근혜 후보가 헌정 사상 첫 여성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높은 현실은 우리 사회가 어디까지 와 있나는 보여주는 바로미터이기도 하다. 유교적 전통이 강한, 게다가 분단된 국가에서 어찌됐든 생물학적으론 '여성'이 분명한 정치인이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어떤 측면에선 역사의 발전이다. 하지만 그 '여성'이 민주주의를 억압했던 전직 대통령의 '딸'이란 점에선 역사의 퇴보다. 심상정 진보정의당 대선 후보가 "한국의 첫 여성 대통령은 진보 대통령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여성 진보 대통령'의 탄생을 기대하기 어려운 게 명백한 현실이다. 상대적으로 성평등에 대한 인식이 떨어지는 보수 정당에서 유력 여성 정치인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게 복잡다단하게 얽힌 우리 사회 정치 현실이다.

또 민주당 문재인 후보와 무소속 안철수 후보 사이에 정치 개혁 방안을 놓고 논쟁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구체적인 개혁 방안은 하나도 내놓지 않고 "여성 대통령이 최고의 정치 쇄신"이라며 말만 들이미는 박 후보의 태도는 무책임하다. 때문에 그가 강조하는 '여성 대통령=쇄신'이라는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기 힘들다.

대선 코 앞에 놓고 '박근혜가 여자냐'를 다투는 정치 현실

생물학적 여성이긴 하나, 사회적인 여성 정체성은 희박한 박근혜 후보를 사상 '첫 여성 대통령'으로 선택할 것이냐, 아니냐는 (여성) 유권자들이 판단할 문제다. 대선이 채 두 달도 남지 않은 시점에서 일주일 내내 여야 간에 난타전을 벌일 무게의 '정치적 쟁점'이 아니다.

이번 대선에서 여야 세 후보는 공통적으로 경제민주화, 복지국가, 정치개혁 등이 정책 과제라고 얘기하고 있다. 하지만 이 역시 겉 껍데기만 있지, 세 후보 모두 구체적인 내용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내놓지 못하고 있다. 말만 있다. 세부적인 정책 쟁점을 놓고 논쟁을 벌이기에도 50일은 짧은 시간이다.

더군다나 야권은 '후보 단일화'라는 결코 풀기 쉽지 않은 과제도 안고 있다. 박근혜 후보 측이 야당의 비판에 "박 후보와 여성 전체를 모독하고 있다"고 발끈하며 며칠째 '여성 대통령 쇄신론'을 '고장난 레코드'처럼 무한 반복하는 이유가 야권의 '후보 단일화'로 쏠리는 시선을 차단하겠다는 의도도 깔린 것으로 보인다. 제2의 'NLL 논란' 같다. 여기에 야당이 '친절'하게 매번 반박하는 것은 패러다임 싸움에서 밀리는 것이다.

세 후보 모두 대선 후보로 나서면서 '네거티브'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런 무의미한 논쟁을 벌일 거면 차라리 '네거티브 검증'이라도 하는 게 생산적이지 않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