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피플/이명박

'CEO 이명박'과 '현대건설 노조 잔혹사'(2009.12.3)

1988년 이명박 대통령이 CEO로 재직하던 현대건설에서는 노조 설립 움직임이 있었다. 회사 측은 노조 설립을 막으려고 애썼지만 결국 노조는 그해 8월 설립됐다. 이 과정에서 지금 다시 돌이켜보면 마치 '조폭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 일어났는데, 노조설립추진위원장이 납치된 사건이다.

88년 현대건설 노조위원장 납치사건의 '몸통'은 누구?

지난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 당시, 현대건설 전직 노조위원장 출신인 서정의 씨는 "1988년 현대건설 노조추진위원장 납치 사건의 총책은 당시 회장으로 있던 이명박"이라고 폭로하면서 당에 관련자료를 제출하고 대선 후보 검증 차원에서 조사를 의뢰한 일이 있었다.

'현대건설 노조추진위원장 납치 사건'은 노조 설립을 주도했던 서정의 씨가 88년 5월 6일부터 5일간 목포로 피랍돼 감금당한 사건이었다. 검찰 조사 결과, 서 씨의 납치는 당시 현대건설 최 모 이사와 강 모 부장이 조직폭력배에게 납치를 청부했고, 그 대가로 2000만 원을 지불한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회장이었던 이 대통령은 납치에 직접 관련은 없지만 노조 설립 방해 혐의로 500만 원의 벌금형을 받았다.

▲ 88년 현대건설 노조추진위원장 서정의 씨의 납치사건을 보도한 기사.

그러나 서 씨는 당시 검찰 수사가 '꼬리 자르기식' 축소 수사였다며 이 대통령의 연루 의혹을 제기했다.

서 씨는 이 대통령이 '배후'라는 증거로 피랍되기 이틀 전 이명박 회장이 자신을 만나 노조 설립을 포기할 것을 종용했으나 서 씨가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자 "노조를 설립하면 물리적 충돌 뿐"이라고 경고한 사실을 들었다. 또 서 씨가 납치된 뒤(5월 10일) 그의 가족들에게 "회사가 사건을 비공개 처리하려고 하는데 가족들이 왜 신고했냐"고 비난한 일도 근거로 제시했다.

납치 사건의 최종 책임자로 처벌을 받았던 최 모 이사가 청부 납치의 대가로 자기 돈 2000만 원을 준 뒤 나중에 회사로부터 돈을 받으려고 했다는 점도 회사 차원의 개입을 의구심을 갖게 하는 점이다. 최 모 씨는 2007년 대선에서 이 문제가 다시 불거졌을 때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오래 전 일이라 할 얘기가 없다"면서도 "해당 사건이 이명박 씨와 전혀 관련이 없다면 말이 안되는 것"이라고 연루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했다.

서 씨는 또 최 모 이사와 강 모 부장 사이의 회사에서의 위치가 납치를 지시하고 실행할 만한 관계에 있다는 점도 의혹으로 들었다. 두 사람의 '윗선'이 납치를 지시했고, 두 사람은 이를 실행했을 것이란 얘기다. 그는 이 두 사람이 추후 다시 현대 계열사 중역으로 재기용된 사실도 강조했다. 최 이사는 현대산업개발 이사로 복직해 전무까지 승진한 뒤 퇴사했고, 강 부장은 프로야구팀 현대 유니콘스의 사장과 구단주를 역임했다.

서 씨는 2007년, 당시 사건의 전모를 담은 책 <이명박 회장의 최후통첩과 피랍>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대선 과정에서 다시 문제가 됐던 이 일은 이명박 캠프 쪽에서 서 씨가 한나라당 당원이라는 점을 들어 '정치적 배후'에 의혹을 강하게 제기하면서 커다란 논란이 되지 않고 넘어갔다. 그해 7월 대선 경선을 앞두고 있었던 후보 검증 청문회에서 질문을 한번 하는 것으로 검증은 끝나 버렸다.

이 대통령은 납치 사건 연루 의혹에 대해 "당시 화이트칼라 노조가 처음으로 현대건설에 등장, 회사로선 당혹스러웠다"며 "모든 기업이 현대에 화이트칼라 노조가 생기면 다른 곳에도 영향을 끼친다고 해서 기업으로선 바람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회사가 부정적인 사고를 갖고 있으니 그런 분위기에 맞춰 설립을 반대하는 분위기가 있었다고 인정한다"면서도 직접적 납치 연루 의혹은 강력 부인했다.

90년 노조집행부 예정자 지방 발령, 불복하자 해고

조직폭력배를 동원한 납치사건은 88년 8월 현대건설 노조 설립의 일종의 기폭제가 됐다. 결성 당시 1894명이었던 노조는 역으로 회사 측의 탄압이 노조 가입을 부추겨 89년 12월 2541명으로 늘었다.

그러자 사측은 다시 '힘'을 동원해 노조 활동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발단은 정주영 명예회장이 89년 12월 그룹사 간부들을 모아 놓고 "사무실에서 일하고 '노동'하지 않는 사람들이 노조를 한다는 것은 웃음거리'라며 '노조 불필요론'을 제기하면서다. '왕회장'의 지시로 경영진들은 노조 탈퇴 강요에 나서게 됐다.

현대건설은 90년 노조집행부로 인선이 예정된 직원이었던 신희철 씨, 김석기 씨 등 5명을 해외 및 지방 발령을 냈고, 이에 불복하자 해고했다. 회사는 이들 해고자들이 출근투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경비원 수십명을 동원해 몸싸움을 벌이는 등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또 노조가 채용한 노보편집위원의 노조 사무실을 출입을 청원 경찰까지 동원해 막고 집단 폭행하는 일도 있었다.

노조는 또 당시 국회 노동위 이상수 의원(평민)을 통해 회사 측의 조직적인 노조탈퇴 강요 사실을 폭로하기도 했다. 당시 노조가 제출한 부서장들이 작성한 노조탈퇴 추진계획 메모 중에는 '본부장님 지시사항 31%'라고 적혀 있었는데, 이는 대리급 이하 사원의 노조 가입률을 30% 이하가 되도록 노조원을 탈퇴시키라는 지시가 내려졌다는 의미였다고 한다.

또 해외지도사업본부의 노조가입 현황표에 '추가지도 요망요원 65(157X0.3)=18'이라고 적혀 있는 것은 이 부서의 노조원 65명 중 부서 전체 인원의 30%를 초과하는 18명을 노조에서 탈퇴하도록 '추가지도'하겠다는 뜻이었다고 한다.

이런 내부지침을 통해 회사는 부서 내의 상하관계, 인간관계, 선.후배 관계, 진습에서의 불이익 압력 등 갖은 방법은 동원해 노조 탈퇴 압력을 행사했다. 그 결과 노조원은 91년 2월 911명으로 현저하게 줄었다.

이에 노조는 여러 차례 노동부와 경찰에 이명박 회장 등 회사 간부들을 부당노동행위 및 폭력 혐의로 고소했지만 '증거 불충분' 등의 이유로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그러다가 국회에서 현대건설 뿐 아니라 포항제철, 풍산 등 대기업들의 노조원 집단탈퇴가 사회적 이슈로 불거지면서 노동부가 뒤늦게 사태 해결에 나섰다.

노동부는 91년 2월 당시 현대건설 정훈목 사장 등 고위 간부 4명을 노동조합법 위반혐의로 검찰에 넘겼다.

또 노동부는 해고된 조합원에 대한 원직복직명령을 내렸다. 현대건설은 이를 이행하지 않았고 서울지방노동청은 결국 그해 6월 이명박 회장을 근로기준법 위반혐의로 불구속 입건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회장은 끝까지를 이들을 복직시키지 않았다.

노조 와해를 위해 법까지 무시하던 CEO가 대통령이 됐는데…

20년도 더 지난 시절 이야기를 새삼 다시 들추는 것은 그때와 지금의 엄청난 차이를 말하고 싶어서다. 민주노조가 막 태동하던 때와 지금 노조의 위상과 힘도 변했고, 노조를 대하는 이 대통령 본인의 위치도 변했다. 'CEO'로서 이명박은 노조 활동을 방해하고 조직을 와해하기 위해 법을 무시할 수도 있었겠지만, '대통령'으로서 이명박은 자신의 노조에 대한 인식과 감정이 어떠하던 간에 법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서는 안된다. 노조에게 '법과 원칙'을 지키라고 하려면 더욱 그렇다.

이 대통령이 과연 노조와의 문제 해결에서 누누이 강조했던 '법과 원칙'에 충실해왔나? 또 노사정 삼각관계에서 이명박 정부가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을까? CEO 시절처럼 자신이 가진 권력을 이용해 상대편을 무조건 굴복시키고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겠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철도노조가 사상 최장 파업을 이어가고 있고, 한국노동연구원이 국책연구기관으로서는 처음으로 직장폐쇄까지 다달았고, 공무원 노조 사무실이 압수수색을 당하는 등 공공기관의 노사 갈등이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지금 묻고 싶은 질문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