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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노무현

다시 떠오르는 '노무현의 사람들' (2009.5.28)

노무현 전 대통령에 앞선 두 전임 대통령은 '계파'를 거느린 사람들이었다. 김영삼(YS)의 '상도동계', 김대중(DJ)의 '동교동계'가 양대 축이었다. 이들 '계파'는 두 사람을 대통령으로 만든 가장 중요한 '자산'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큰 '빚'이기도 했다. 야당 지도자로 오랜 세월을 보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계파'의 구성원들은 균질적이지 않았다. 다종다양한 사람들이었다.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 노 전 대통령은 '계파'가 없었다. 이전까지 재선의원, 1년 남짓의 짧은 장관 경력이 전부였기 때문에 '계파'를 형성할 만큼의 시간이 없었다. 대선후보가 됐을 때 그는 현역의원도 아니었다. 2002년 대선후보 경선과정을 시작할 당시 노무현 후보를 지지한 의원은 천정배 의원 한명에 불과했다.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 '노무현 사람들'은 주로 국회 밖에 포진해 있었다. 현실적으로 나눌 권력이 없었기 때문에 이 집단은 정치적 이해관계라기보다는 정치적 이상을 공유했다. 그래서 비교적 균질적으로 강한 결속력을 가졌다. 이런 강한 결속력은 집권 후 포용력 부족이라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안희정, 이광재, 윤태영, 천호선…386 참모들

▲ 집권 초 청와대 참모진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 ⓒ연합
노 전 대통령의 측근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386 운동권 출신'이다. '좌희정-우광재'라고 불렸던 가장 신임 받았던 참모진인 안희정(민주당 최고위원), 이광재(국회의원)를 비롯해 서갑원(국회의원), 백원우(국회의원), 청와대 대변인을 지냈던 윤태영, 김만수, 천호선 등이 그들이다. 이들 중 이광재, 안희정 등은 13대 초선 의원시절부터 인연 맺은 보좌진 출신이며, 김만수, 천호선 등은 대선주자로 떠오른 이후 영입한 참모들이다.

이들 386 운동권 출신 참모진들은 노무현 정부에서 주로 청와대 비서진으로 일했다. 이들 중에는 유독 연세대 출신(이광재, 윤태영, 김만수, 천호선 등)이 많아 청와대 내에서 '연대 라인'을 형성하기도 했다. 김우식 연세대 전 총장이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영입된 것도 이들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문재인, 이호철, 이강철…영남인맥

노 전 대통령은 88년 총선을 통해 중앙정치에 진출하기까지 부산에서 활동했다. 이호철 전 민정수석 등 부산지역 386 운동권들은 81년 부림사태 변론을 계기로 만나게 됐다.

재임시 가장 신임했던 참모이자 평생 '친구'였던 문재인 전 비서실장(변호사. 사시 22회)은 부산지역에서 시국사범 변론을 하면서 인연을 맺게 됐다. 문 전 실장은 건강문제를 이유로 잠시 청와대를 떠나기도 했으나 5년 내내 노 전 대통령을 보좌했다. 퇴임 이후에도 지난 4월 30일 박연차 사건으로 노 전 대통령이 검찰 조사를 받을 때 변호인으로 동행했다. 노 전 대통령은 "친구로 그 사람을 평가할 수 있다"며 "나는 문재인 친구"라는 말로 그에 대한 신망을 표출하기도 했다.

87년 6월 항쟁 당시 만난 이강철 전 시민사회수석, 대선 당시 합류한 김두관 전 행정자치부 장관 등도 노 전 대통령 직계인 영남개혁세력으로 묶을 수 있다. 노무현 정부 부동산 정책의 기틀을 잡은 이정우 전 청와대 경제수석(경북대 교수), 김병준 전 청와대 정책실장(국민대 교수) 등은 영남 출신의 개혁 성향 학자들이다.

문성근, 명계남, 노혜경…노사모

노 전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만든 일등공신이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다. 영화인 명계남, 문성근 씨 등은 노사모 대표일꾼으로 노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게 됐다. 노 전 대통령 후원회장이었던 이기명 씨도 노사모 출신의 측근 중 하나다. 노혜경 전 청와대 국정홍보비서관, 김정란 상지대 교수 등도 노사모에서 활발히 활동한 인사다.

유시민, 이해찬, 한명숙…참여정부 시절 관료들

▲노 전 대통령 빈소에서 슬픔에 잠겨 있는 유시민 전 장관. ⓒ뉴시스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대중들에게 일종의 '친노(親盧) 아이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 전 장관은 2002년 대선에서 민주당 후단협 등 반노-비노세력이 노 전 대통령의 후보사퇴를 종용하는 것을 보고 분개해 정치에 뛰어들어든 뒤 '노무현의 정치적 경호실장'을 자임했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독립'은 아직 미완이다. 그는 2007년 9월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 출마했지만 친노 후보단일화 차원에서 경선 첫날 이해찬 전 총리 지지 선언을 하고 중도 하차했다. 18대 총선에서 고향인 대구지역에 출마했지만 한나라당 주호영 의원에게 패했다. 노 전 대통령 서거로 다시 결집하고 있는 노 대통령 지지자들은 유 전 장관에게 쏠리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노무현 정부에서 국무총리를 지낸 이해찬 전 총리와 한명숙 전 총리는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의 '가교' 역할이기도 하다. 김대중 정부에서 이 전 총리는 교육부 장관을, 한 전 총리는 여성부 장관을 지냈다.

다시 주목받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의 급작스런 서거로 '노무현의 사람'들은 속속 봉하마을을 찾았고, 언론의 관심도 집중되고 있다.

노 전 대통령 퇴임 후 2008년 총선에서 한명숙, 김두관, 유시민 등 줄줄이 낙마하고, 이광재, 서갑원, 백원우 의원 정도가 의회 입성에 성공해 정치권에서 친노 입지가 크게 줄어들었었다.

특히 그나마 정치적 자립에 성공하는 것 같았던 이광재 의원은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한 혐의로 지난 3월 전격 구속됐고, 안희정, 서갑원 등도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각각 불법자금을 받은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 이강철 전 시민사회수석, 박정규 전 민정수석도 구속되는 등 노무현 정부의 도덕성은 이미 상처가 날대로 났었다.

지역주의 타파, 못다 이룬 꿈

물론 노 전 대통령의 서거로 검찰 수사가 '정치 보복성'이라는 여론이 확산되면서 이 문제에 대한 정치적 부담은 줄어들었다.

아직 노 전 대통령 서거가 정치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지 예측하기는 아직 힘들다. 다만 '지역주의 타파'라는 노 전 대통령이 일생동안 추구했던 목표는 미완의 과제로 남았다. 노 전 대통령은 92년 총선, 95년 부산시장 선거, 2000년 총선에서 당시 민주당 후보로 손쉬운 승리가 예상되는 수도권이 아니라 부신 출마를 고집해 연거푸 낙선했다.

대통령이 된 뒤에서 한나라당에 선거구제 개편을 조건으로 대연정을 제안하는 등 지역주의 문제를 평생 정치적 화두로 삼았다. 대연정 제안은 결과적으로 선거제도는 개편되지 않았고 자신의 지지자들만 등 돌리게 되는 계기가 됐다.

이명박 정부 들어 민주당 세력 자체가 줄어들면서 지역주의는 오히려 더 심화되는 듯 하다. 지난해 총선에서 민주당은 대구경북에 단 한명의 후보도 당선시키지 못했다.

강금원, 박연차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가 본격화되기 전에는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친노세력들이 탈당해 영남지역을 기반으로 개혁신당을 만들 것이라는 관측이 나돌기도 했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의 서거로 '구심점'이 사라져 현실적으로 더 어려운 일이 됐다.

이명박 정부에 투항한 노무현 정부 출신 인사들

▲ 노무현 정부에서 국무총리를 지낸 한덕수 주미대사. ⓒ뉴시스
'ABR'(Anything But Roh)를 표방하고 있는 이명박 정부에서 의외로 노무현 정부 출신 인사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노 전 대통령 입장에서는 일종의 '배신자'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은 주로 관료 출신들이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노무현 정부에서 금융감독위원장을 지냈다.

한덕수 주미대사는 노무현 정부에서 경제부총리를 거쳐 국무총리까지 올랐었다.

윤진식 청와대 경제수석은 노무현 정부에서 산업자원부 장관으로 일했다.

노무현 정부에서 국방장관을 지냈던 김장수 의원은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공천을 받아 금배지를 달았다.

허준영 코레일 사장은 노무현 정부에서 경찰청장을 지냈으나, 2005년 시위 도중 농민 2명이 사망한 사건의 책임을 지고 불명예 퇴진시킨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2006년 노무현 정권을 맹비난 하면서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그는 2006년 7월과 2008년 총선에 연거푸 한나라당 공천을 신청했으나 낙마했다. 대신 코레일 사장으로 임명돼 '낙하산 인사' 논란을 불러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