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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극우들의 '워싱턴 시위'가 예사롭지 않은 이유

[2020 美 대선 읽기] 트럼프 대통령과 '백인 인종주의'

2월 8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 시내에서 예사롭지 않은 시위가 열렸다. 이날 오후 4시 워싱턴DC 유니온 스테이션 인근에서 백인 민족주의자 단체인 '애국전선(Patriot Front)'이 행진을 벌였다.

'WUSA90' 보도에 따르면, 집회 참석자들은 소매에 성조기가 달린 긴팔 윗도리에 베이지색 모자를 단체로 맞춰 입고, 복면과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렸다. 이들은 성조기 깃발을 들고 "미국을 되찾자(Reclaim America)"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유니온 스테이션에서 인근 월마트까지 행진을 벌였다고 한다.  

▲ 8일 워싱턴 시내에서 있었던 극우단체의 행진. ⓒWUSA90 화면 캡처

이 단체는 지난해 6월에도 워싱턴DC와 위스콘신에서 유사한 집회를 벌였다. 이들은 당시 'USS 리버티호 피습사건' 52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집회를 열었다고 밝혔다. 이들은 1967년 이스라엘군에 의해 미 군함이 무차별 공격당한 USS 리버티호 피습사건에 대해 동맹이란 이름 때문에 미국인들이 피를 흘려야 하는 부당함에 대한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이 집회를 보도한 'WUSA90'은 이들에 대해 "노골적인 파시스트 아젠다에 사로잡힌 집단", "백인 민족주의 혐오 단체"라고 비난했다. 또 "일부 사람들에게 겁장이라고 불리는 것처럼 이들은 경찰에 둘러싸여 유니온 스테이션에서 (한 블럭 떨어진 거리에 있는) 월마트까지만 행진을 벌였다"고 비꼬기도 했다.  

이처럼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주장과 행동이 여론의 지지를 받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날 도심 시위를 일부 극단주의자들의 치기어린 행동이라고 가볍게 여길 문제는 아니다. 특히 지난 주말은 3일 아이오와 경선을 시작으로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가 본격적으로 막이 오른 시점이기도 하다.  

이들 단체는 2017년 8월 '샬러츠빌 폭동'을 일으킨 '우파 연합(United the Right)'과도 궤를 같이 한다. '살러츠빌 폭동'은  샬러츠빌에서 미국 남북전쟁 당시 남부연합의 로버트 리 장군 동상을 철거하기로 하자, 이를 반대하는 극우 인종주의자들이 집회를 하는 과정에서 1명의 여성이 숨지고 36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사건이다. 리 장군 동상 철거를 반대하는 극우단체와 이에 대항하는 진보단체가 모두 샬러츠빌에 집결해 집회를 벌였고, 이 와중에 극우 청년이 차를 몰고 리 장군의 동상 철거를 찬성하는 진보 측 시위대 쪽으로 돌진해 사상자가 발생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문제는 이 참사가 일어난 후 트럼프 대통령이 보인 반응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사건 직후 "여러 편에서 나타난 증오와 편결, 폭력의 지독한 장면을 최대한 강력한 표현으로 규탄한다"고 말했다. 폭력 사태의 책임이 극우 백인 인종주의자들이 아니라 '여러 편'에 있다는 주장이다. 이 발언에 대해 비난이 쏟아지자 트럼프 대통령은 "인종차별은 악"이라며 백기를 잠시 들었다가 며칠 후 다시 "한 이야기를 놓고 두편이 있다"며 "대안 우파를 공격한 대안 좌파는 어떤가? 그들이 손에 곤봉을 휘두르며 공격한 것은 어떤가?(..)그들은 매우 폭력적이었다"고 또다시 진보 측에 책임을 돌렸다.  

최근 '샬러츠빌 폭동'은 떠오르게 하는 대규모 집회가 버지니아 리치몬드에서 열렸을 때, 보인 트럼프 대통령의 태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난 1월 20일 리치몬드에 위치한 버지니아주 의회 앞에서 버지니아 주지사와 버지니아 주의회가 주도하는 총기 규제법안에 반대하는 대규모 총기 수호 집회가 열렸다. 경찰 추산 2만2000명이 참여했고, 상당수의 집회 참가자가 총기로 중무장했다. 다행히 별다른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온몸에 총기와 총알을 두른 집회 참가자들의 모습은 '폭동'을 연상케 했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은 이들 총기 무장 시위대를 '독려'하는 메시지를 트위터에 올렸다. 그는 트위터에 "버지니아의 민주당은 여러분의 수정헌법 2조 권리를 빼앗으려 애쓰고 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며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해서는 안 된다. 2020년 (대선과 다른 선거)에 공화당에 투표하라"고 글을 올렸다. 수정헌법 2조는 개인이 총기를 소유할 권리를 보장하는 헌법 조항으로, 미국에서 총기 규제 관련 논란이 벌어질 때 총기 규제를 반대하는 이들이 주장의 근거가 되는 조항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처럼 백인 인종주의 문제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그가 기반한 정치적 지지 세력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트럼프 정권의 탄생 자체가 이민자들에게 자신들의 일자리와 권익이 빼앗기고 있다는 백인 노동자 계층의 분노와 박탈감에 뿌리를 두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내세운 '아메리카 퍼스트(America First)' 정책에서 '아메리카'는 다양한 (인종의) 인재를 받아들여 기술과 경제적 발전을 꾀하던 과거의 '아메리카'를 의미하지 않는다. 트럼프 대통령이 가장 애착을 보이는 대선 공약이 미국과 멕시코 사이의 '국경 장벽'이라는 점이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트럼프 대통령은 '아메리카 퍼스트' 정책으로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에서 벼랑 끝에 내몰린 백인 노동자들을 정치적으로 호명하는데 성공했고, 2020년 대선에서도 마찬가지로 이 동력을 활용하려 한다.  

8일 워싱턴 시내로 나온 극우 시위대가 "동맹이라는 이름으로 미국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의 부당함을 지적하는 목소리는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 일본 등 미군이 주도하는 국가들에게 그간 '동맹'이라는 이름 하에 미국이 '퍼주기'를 해왔다며 과도한 방위비 분담금 인상을 압박하는 목소리와 동일한 파장 안에 놓여 있다.  

김동석 미주한인유권자연대 대표는 지난 6일 워싱턴DC에서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미국에서 백인 중심의 우경화는 경제적인 측면과 사회문화적인 측면 모두에서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한다"며 "그 틈바구니 속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박탈감을 갖고 사는 이들을 이용한 인종주의적 정치 캠페인을 아주 영악하게 해왔다"고 말했다. 

"현재 미국 사회는 세계화와 반세계화의 흐름이 같이 가고 있다. 자본의 확장을 꾀하는 자본가들이 추구하는 세계화와 경제적 양극화로 인해 궁핍해진 대다수 노동자 계층이 추구하는 반세계화의 흐름이 동시에 존재한다. 이런 사회경제적 모순은 새로운 정치적 문제의식과 정책적 해결책을 가져오지 않고 기존의 정치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한다면 풀릴 수 없는 문제이며, 퇴행적인 현상은 더 심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안타깝게도 기존의 정치권, 즉 공화-민주 양당이 시민사회의 변화된 요구를 담아 내는 정책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양당의 전통적 지지층이 혼란스럽게 분산, 분화되고 있다.(김동석 대표)"

이번 대선에서 트럼프 정권 1기가 보여준 명백한 문제와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을 미국 민주당이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그 해답을 찾는다면 미국 사회와 정치는 새로운 길을 가게 될 것이고, 실패한다면 극우 인종주의자와 같은 '퇴행'이  더 힘을 받는 트럼프 정권 2기가 펼쳐질 지도 모른다.   

 

▲ 워싱턴 시위를 벌인 극우단체 홈페이지.ⓒPatriot Front 홈페이지 화면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