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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때렸으니, 강간이 아니다?

"폭행·협박 전제하는 강간죄 개정해야"

 

지난달 법원이 10세 아동이 채팅앱을 통해 만난 30대 남성에게 성폭행 당했으나 미성년자 강간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판결을 내려 많은 이들의 분노를 샀다. 

서울고법 형사9부(부장판사 한규현)는 지난 6월 13일 성폭력처벌법 위반(13세 미만 미성년자 강간) 혐의로 기소된 이모 씨에게 징역 8년을 선고한 원심을 파기하고 징역 3년을 선고했다. 1심은 이 씨가 폭행·협박으로 피해자 A양을 억압해 성폭행했다고 판단해 미성년자 강간죄를 적용해 징역 8년을 선고했으나, 항소심 재판부는 피해자의 진술 만으로는 폭행·협박을 입증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미성년자 강간죄가 아닌 미성년자 의제강간죄를 적용해 징역 3년을 선고했다.  

이런 '비상식적인 판결'이 나올 수 있는 이유는 우리 형법에서 강간죄의 구성 요건으로 "상대방의 저항을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로 폭행·협박”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성폭력은 폭행·협박을 행사하지 않고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성폭력이 성별 위계 관계에 기반한 폭력이라는 점에서 이처럼 "최협의의 폭행·협박"을 강간죄 성립의 전제 조건으로 보는 것이 남성중심적 시각이라는 비판은 오래 전부터 제기되어 왔다. 

성폭력 피해 10건 중 7건 이상이 '폭행·협박' 없이 발생 


특히 앞서 언급한 10세 아동의 피해 사례처럼 미성년자의 경우 성폭력에 이르기까지 과정 자체가 폭행.협박을 하지 않더라도 저항을 하기 힘들만큼 공포를 느낄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제 2019년 1월부터 3월까지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를 통해 전체 66개 성폭력상담소에 접수된 강간(유사강간포함) 상담사례들을 살펴본 결과, 성폭력 피해사례 총 1030명 중 직접적인 폭행·협박 없이 발생한 성폭력 피해사례는 71.4%(735명)에 달하고, 직접적인 폭행‧협박이 행사된 성폭력 피해사례는 28.6%(295명)에 불과했다. 피해자가 미성년자(19세 미만)인 경우, 직접적인 폭행.협박 없이 발생한 성폭력 피해 사례의 비율은 76.4%로 더 높았다. 미성년자 뿐 아니라 장애인, 고령자 등 피해자가 신체적, 심리적으로 취약할 수록 폭행·협박을 동반하지 않은 성폭력의 비율이 높았다.  

 

▲ 2019년 1월~3월까지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를 통해 전체 66개 성폭력상담소에 접수된 강간(유사강간포함) 상담사례.

 


이런 현실에서 지난달 10세 아동에 대한 항소심 재판부처럼 해당 재판부가 성인지적 감수성 없이 기계적인 법 적용을 한다면 오히려 보호 받아야할 미성년자, 장애인, 고령자 등이 법적 보호의 '사각지대'로 내몰리는 모순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강간죄 개정을 위한 연대회의'(이하 연대회의)는 9일 보도자료와 제2차 의견서를 내고 이런 강간죄 구성 요건으로 여전히 '최협의설'을 택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비판하며 "형법 제297조 강간죄의 구성 요건을 '동의' 여부로 개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연대회의는 성폭력상담소에 접수된 피해 사례의 통계를 근거로 "성폭력 신고율이 10% 미만으로 매우 낮고, 현행 수사·재판기관에서 강간죄의 구성요건을 '상대방의 저항을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로 최협의의 폭행·협박'으로 해석하고 있는 현실에서 실제로 처벌 가능한 성폭력 피해사례는 28.6%보다 훨씬 낮을 수밖에 없다"고 문제를 지적했다. 

이들은 '폭행·협박이 없는 성폭력'의 경우 주로 두 가지 맥락에서 발생한다고 밝혔다. 

첫째로, 가해자가 성폭력 행위 당시에 직접적인 폭행·협박을 하지 않더라도 피해자가 벗어나기 어렵고 도움받을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해 저항을 포기하는 사례들이 있다. 상습적으로 신체적인 위협을 가해온 남자친구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저항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발생한 성폭력, 입원 중에 의료인에 의해 발생한 성폭력, 여행지에서 가이드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고립된 상황에서 발생한 성폭력 등이 이에 해당한다. 상담사례에 의하면, 많은 성폭력 피해자가 가해자와의 관계, 힘 또는 권력의 차이, 피해자의 취약한 상황, 상습적인 학대에 노출된 경험 등에 따라 직접적인 폭행·협박이 없더라도 저항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인다.

둘째로, 가해자가 성폭력 행위 당시에 직접적인 폭행·협박을 하지 않더라도 피해자를 속이거나 피해자가 신체적·정신적으로 무력한 상태를 이용하는 사례들이 있다. 피해자가 잠이 든 상황에서 발생한 성폭력, 피해자가 술 또는 약물에 취한 상태일 때 발생한 성폭력, 피해자가 거부 의사를 밝혔음에도 기습적으로 발생한 성폭력 등이 이에 해당한다. 비록 준강간죄 등에서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의 상태를 이용하여" 성폭력을 하는 경우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나,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이라는 구성요건은 "최협의의 폭행·협박"에 준하는 매우 협소한 경우에만 성립이 인정되고 있어, 두 번째 유형에 해당하는 성폭력 상담사례 중 대부분은 준강간죄 등으로 포섭될 수 없다. 

연대회의는 "2018년 '#미투 운동'은 성폭력이 직접적인 폭행·협박이 아닌 지위와 권세, 영향력 등을 이용하여 발생하고 있는 현실을 보여주었다. 현실에서 성적 침해는 가해자의 물리적인 폭행이나 명시적인 협박을 수반하지 않는 다양한 상황에서 발생하고 있다"며 조속한 법 개정을 촉구했다.  

독일·영국·스웨덴 등의 입법례..."동의 없는", "인식 가능한 의사에 반하는" 성적 침해


법 개정의 방향에 이들은 "국회는 하루빨리 강간죄의 구성요건을 "폭행 또는 협박" 여부가 아니라 "동의 없이" 또는 "명백한 동의 없이" 등으로 "동의" 여부를 중심으로 규정하도록 형법 및 성폭력 관련 법률 전반을 개정하여야 한다"며 "이는 UN 여성차별철폐위원회(2018.3.9.)에서 한국 정부에 권고한 사항이며 세계적 흐름"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독일이나 영국, 스웨덴 등 선진국들은 이미 피해자의 의사에 반하는 또는 동의 없는 성적 침해를 강간죄 등으로 규정함으로써 폭행‧협박 없는 성폭력 사례들을 처벌하고 있다. 독일의 경우에는 "인식 가능한 의사에 반하는" 성적 침해를 기본적인 성폭력 범죄 개념으로 변경하였고, 스웨덴의 경우에는 피해자의 "동의 없이" 성적 행위를 하는 것을 강간죄로 규정하면서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의존하는 상황을 이용"하는 것을 피해자의 동의 없는 행위로 명시하고 있다. 한국도 이러한 입법 변화를 고려하여 형법상 강간죄 등의 법 개정을 추진하고, 성폭력 피해를 방치하는 한국의 법 현실을 개선하여야 할 것이다."

연대회의는 여성단체 등 총 208개 단체로 구성된 협의체이며, 앞서 지난 지난 3월에도 국회법제사법위원회를 상대로 강간죄 구성 요건을 바꿔야 한다는 취지의 제1차 의견서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