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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고통 올림픽' 보며 '팝콘각'? 공론장이 무너졌다

[프레시안books] 엄기호의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이 시대가 거의 완벽하게 잃어버리고 있는 삶의 태도가 신중함"이라고 말하는 저자의 신간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엄기호 지음, 나무연필 펴냄)는 '신중함'으로 가득 찬 책이다. 이 책은 인간의 삶에서 가장 무거운 주제 중 하나인 '고통'과 그 고통을 '함께 한다'는 것에 대한 성찰을 담았다. 이는 '동행의 언어'는 사라지고 '동원의 언어'만 난무하는 이 시대에 더욱 요원한 일이 됐다. 

'공론의 장'에서의 소통 방식이 근본적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언어와 글을 통해 타인의 경험과 이의 한 극단인 고통에 대해 소통하고 그 고통을 배태한 공동체(사회)의 문제에 대해 협상과 타협을 거쳐 합의를 도출하던 시스템은 인터넷의 시대에 왜곡되기 시작했다.  

▲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엄기호 지음, 나무연필 펴냄

"이것은 인쇄술로 만들어졌던 공론장과 전혀 반대 방향으로 작동한다. 인쇄술이 바깥과의 끊임없는 교류를 통해 안으로부터 거리를 두게 하는 것이었다면, 인터넷은 반대로 안에서 웅크리고 앉아 내부와 절대적으로 동일시하며 바깥을 끊임없이 적대시하도록 한다. 가까운 것을 밀쳐내고 멀리 있는 것을 가까이 끌어당기는 것을 넘어 가까운 것을 적대로 돌리고 멀리 있는 것을 지나치게 끌어당겨 새로운 '내부', 그것도 절대적인 내부로 만들었다. 마을도 아닌 언어의 철옹성, 게토가 만들어져 갔다. 새로운 내부가 바깥, 세계에 대해 수행하는 것은 전쟁이다. (...) '우리'를 억압하는 '바깥'과의 싸움에서 나는 더 많은 전과를 올려 내부에 '충성'해야 하며, 그 충성을 통해 나는 내부에서 '명성'을 쌓을 수 있다. 내부에서 일어나는 것은 의견 충돌이라는 '정치'가 아니라 더 높은 명성을 얻기 위한 충성 경쟁이다. (...) 사람들은 내부에서 잊히지 않기 위해 더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글을 쓰기 시작했다. 외부를 조롱하고 비웃고 사냥하는 글들이 난무했다. (...) 그 결과 글을 읽을수록 해상도가 높아지기는커녕 점점 더 떨어졌다. 사물과 사람, 사태를 보는 입체적인 이야기는 배척받아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는 선악 이분법이 매우 또렷한 글들이 채워갔다. 해상도는 떨어지고 색감만 자극적으로 올라갔다. 공론장에 선 사람들은 이쪽과 저쪽으로 줄을 서야 했다. 줄을 서지 않으면 가차 없이 비난 받고 단죄되었다. 동행의 언어는 사라지고 동원의 언어만 남았다." 


이제 '공론의 장'은 '혐오'의 언어만 넘쳐난다. 서로가 서로를 혐오하기 때문에 타인의 존엄을 보호해야 한다는 최소한의 윤리도 작동하지 않는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이 혐오의 악순환에서 벗어나는 길은 '공론의 장'에서 물러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어 보인다. 

문제는 '사라지는 것'을 선택할 수 없는 고통 받는 이들이다. 이전에도 고통 받는 이들은 상대적으로 소수자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이들의 문제는 공유되고 치유되기 힘들었다. 인터넷의 시대에 소수자들은 '고립'을 넘어 연결을 통해 '세계'를 지을 수 있게 됐지만, 앞서 설명한 '세계'의 역설이 작동되기 시작했다. 인터넷 공론의 장에서 고통 받는 자들은 공감하는 이들을 얻기 위해 자신의 고통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그 고통으로 인해 자신이 얼마나 파괴되었는지, 경쟁적으로 전시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여졌다. 플랫폼에서 고통끼리 경쟁하는 '고통의 올림픽'을 사람들은 '팝콘'을 먹으며 구경하며 품평한다. 처절하게 파괴된 것처럼 보이지 않는 피해자들은 그 진실성을 오해 받고 바로 정치적 공격과 혐오의 대상이 되고 만다. 일부 보수 진영에서 세월호 유가족이나 백남기 농민 유가족들을 상대로 '가짜 뉴스', '비난', '조롱' 등을 쏟아낸 것은 이런 메커니즘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공론의 장'의 작동 방식이 이렇게 바뀐 것은 소통 방식의 변화 때문만은 아니다. 사회적 영역 만이 아니라 친밀성의 영역에서마저도 '성과'가 평가 기준이 되며, 이로 인해 사적 영역에서마저도 '대체 가능성'이 상존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가 더 근본적인 원인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에서 사랑과 우정은 큰 위기에 처해 있다. 특히 이 시대의 사랑은 도통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그 사람'으로 대하는 법을 모른다. (...) "저는 여성을 혐오하지 않습니다. 여성을 제가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이 말은 존중이 모욕으로 도착되는 것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성별 이분법에 기초한 사랑은 여성을 역할로 존중하고 열광하는 법만 알았지 그 역할과의 차이로 존재하는 그의 인격을 존중하는 법에 관해서는 무지하고 무능했다. (...) 존중을 모르는 사랑이 불가능해지는 동안 사랑과 우정의 다른 측면 역시 변질되기 시작했다. 사랑과 우정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익을 바라지 않고 현존으로 기쁨을 얻는다. (...) 현존의 기쁨에 대한 확신이 불가능해진 상태에서 친밀성의 관계를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유익한 존재'가 되어 그의 관심을 끄는 수밖에 없다. (...) 사회적 영역처럼 친밀성 영역에서도 존재감은 '현존'이 아니라 필사적인 '관심 끌기'로만 가능한 것이 되었다."

친밀한 관계가 산산히 부서진 이 시대에 이해를 바탕으로 다시 한번 저자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저자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인정 투쟁이자 혐오 경쟁의 장'이 되어 버린 이 시대의 '공론의 장'에 사라졌던 많은 이들이 다시 돌아와야 한다고 말한다. 고통을 받는 사람의 곁에 있는 사람의 곁을 지키는, 다른 이와 동행하며 세상을 보좌하기 위한 '신중한 글쓰기'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내가 혐오하는 집단에 혐오의 책임을 전가하며, 증오를 정치적 힘으로 동원하는 정치 기술로는 신자유주의가 몰고 온 '고통(孤痛)'을 치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저자 엄기호는 이 책에 앞서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단속사회>, <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 등 이 시대 한국 사회가 직면한 '최전선'의 문제를 다룬 책을 꾸준히 써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