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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

안희정 "아내 덕에 페미니즘 공부를 합니다"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참가 중인 문재인, 안희정, 이재명(가나다 순) 후보 측에 세 가지 질문을 공통으로 던졌습니다. 

1) 000의 사건 세 가지, 2) 000을 만든 세 사람, 3) 000이 바꿀 미래 세가지. 

후보들이 보내온 답변에 맞춰 한 후보당 1-2회에 걸쳐 게재합니다. 가장 먼저 답변을 보내온 안희정 후보의 '세 가지'입니다.  

안희정 후보가 꼽은 인생 '세 가지' 사건은 5.18 광주민주항쟁, 1988년 안기부(국가안전기획부)에 끌려가 고문을 받은 일, 2010년 충남도지사 당선입니다. 

5.18 광주민주항쟁은 안 후보가 학생운동에 투신하게 된 계기가 된 사건으로 보입니다. 안 후보는 당시 "전두환-노태우는 국민들의 세금으로 만든 군대로 쿠데타를 하는데, 시민의 힘으로 나라를 다시 세워야 한다"며 "시민혁명을 하려 했다"고 합니다. 때문에 "남대전고 1학년 때 계엄사에 잡혀가 제적을 당했"고 결국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게 됩니다. 안 후보는 5.18에 대해 "광주와 김대중, 그리고 민주당 역사와 만난 첫 사건"이라고 규정합니다. 

두 번째로 꼽은 '1988년 남산 안기부 고문' 사건은 안 후보가 현실 정치로 뛰어들게 된 계기가 됐습니다. 대학 입학 후 학생운동에 뛰어든 안 후보는 1986년 '건대 사태'에 이어 1988년 '반미청년회 사건'으로 두 번째 수감되면서 남산 안기부로 끌려가게 됐습니다. 

"그 곳에서 4인 1조로 매일같이 자행되는 폭력은 육체의 고통을 넘는 수치심을 안겼다. 그런데 폭력보다 더 견딜 수 없었던 것은 내가 좇던 이념을 끊임없이 흔들어대는 질문들이었다. '미국을 몰아내면, 세계질서를 대체할 수 있는 건 뭔데?', '네가 말하는 민족 자주 경제를 건설한다는 게 대체 뭔데?' 지속적이고 교묘한 질문 공세에 나는 무너져 내렸다. 앙상한 안티테제 말고는 가진 답이 없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민중과 사회적 약자의 고통을 공감하고 이를 바로잡겠다는 정의감은 충만했지만, 그래서 어떤 사회를 어떻게 만들겠다는 것인지에 대한 준비는 없었다." 

이 일이 있고 1년 뒤인 1989년(안 후보가 "혁명이 멈췄다"고 표현한 동유럽 사회주의 정권들의 붕괴가 일어난 해), 그는 민주당에 입당해 현실정치에 입문하게 됩니다. 


안 후보가 세 번째로 꼽은 사건은 2010년 충남도지사 당선입니다. 이번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출마를 가능하게 한 가장 직접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 후보는 "2010년 민주당이 단 한 번도 깃발을 꽂지 못했던 충청남도에서 도지사로 당선됐고, 민주당과 386하면 좌파, 빨갱이라 생각하던 지역에서 재선을 했다"고 합니다. 또 "극단적 여소야대 의회와 함께 도정을 수행하면서 민주적 대화와 타협으로 협치를 해 왔다"고 평가합니다. 이번 경선 과정에서 적잖은 비판과 논란을 불러온 '대연정' 발언은 이런 도정 경험에도 기반을 두고 있는 셈입니다.  

안 후보는 지자체장으로서 자신의 정치적 성과에 대해 "양성평등 비전과 인권 선언, 노동정책 기본계획, 노인빈곤 정책, 농업혁신, 그리고 전면 친환경 무상급식 등 협치가 성과로 이어지는 성공적인 정부 모델을 만들 수 있었다"며 "지자체 유일 6년 연속 공약 이행 평가 최우수, 전국 시도지사 직무수행 평가 11개월 연속 1위, 도정 긍정 평가율 78.7%로 도민의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고 자부했습니다.  


▲ 대학 졸업식 때 부모님과 함께 찍은 사진 ⓒ안희정



다음으로 두 번째 질문인 안희정을 만든 '세 사람' 이야기를 통해 좀 더 인간적인 면모를 살펴볼까요?그는 어머니, 노무현, 민주원(부인)을 꼽았습니다.

어머니는 많은 이들에게 특별한 '사람'입니다. 안 후보가 어머니를 떠올리며 밝힌 일화는 고등학교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남대전 고등학교를 그만둔 뒤 고향에 돌아와 책이나 읽고 있던 내 앞에 아버지는 농약병을 꺼내놓으셨다. '학교에 다시 갈래, 아니면 이거 먹고 나랑 같이 죽을래?' 아버지를 거역할 수는 없어서 1981년에 두 번째 고등학교, 서울 대방동의 성남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상경을 해서도 혁명을 하겠다며 대학가를 어슬렁거렸고, 학교생활에 충실할 리 만무했다. 결국 3개월 만에 부모님을 설득해 자퇴를 했다.  

부모님과 교무실에서 자퇴서에 도장을 찍고 나오는데 교실에서 국어책 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들려왔다. 어머니는 '다른 아이들은 저렇게 공부하는데 왜 너만 이렇게 그만두려 하냐'며 정문 앞에서 털썩 주저앉아 우셨다.  

이후 거의 자취방에 혼자 지냈다. 형 친구들이 집에 놀러 오면 같이 사회과학 얘기하고 역사 얘기를 했다. 누님이 야학 선생님을 하던 교회의 신자들과 어울리거나 청계천 골목길을 혼자 돌아다녔다. 지나보면 그 시절이 너무 외롭고 힘들었다. 그때 외로움과 고독의 상처가 굉장히 오래 갔다. 그래도 어머니의 사랑과 눈물 때문에 그 시기를 잘 버텼다."

▲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 안 후보는 "가장 따라 배우고 싶은 모델"이라고 밝혔다. ⓒ안희정

안희정 후보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오른 팔'(좌광재 우희정)이라 불릴 정도로 노 전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했습니다. 그는 노 전 대통령에 대해 "현실 정치인으로 이끌어준 분이자, 원칙을 지키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가르쳐준 스승"이자 "내가 가장 따라 배우고 싶은 모델"이라고 밝혔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보스로 군림하지 않고 파트너로서 참모진과 민주적으로 의사결정을 했다. 고위인사를 만날 때도 해당 업무를 맡은 참모가 참석하게 했고, 참모들의 지위와 역할을 끊임없이 높여주려 노력했다. 원칙과 상식의 시대, 특권과 반칙 없는 세상. 노무현 대통령은 내게 두툼한 월급봉투는 못 줬지만 희망을 줬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으로 앞당겨진 2017년 대선에서 지지율 1, 2위를 기록하고 있는 문재인, 안희정 두 후보는 모두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했던 이들입니다. '장미 대선'을 가능하게 한 민심은 이른바 적폐 청산, 즉 대한민국의 낡은 정치와 사회 구조를 뜯어 고쳐 달라는 것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스스로 "구시대의 막내가 될 수 밖에 없었다"(2003년 11월 5일 지식인 원로들과의 오찬 회동에서 한 발언)고 안타까워 했던 것처럼, 노무현 정부도 극복해야할 과제를 분명히 남겼습니다. (관련기사 : 노 대통령에게 쏟아진 원로들의 고언) 안 후보는 노 전 대통령이 남긴 숙제로 "지역주의 극복과 국민 통합"을 지적했습니다. 

"대학 1학년 도서관 앞자리에 앉았던 동갑내기 여학생", "6년 열애 끝 결혼", "두 번의 수감 생활에도 불구하고 고무신 거꾸로 안 신고 옥바라지를 한" 부인 민주원 씨가 안 후보를 만든 세 번째 사람이라고 합니다.  

대부분 동년배 남편들이 그러하듯 육아와 가사노동을 등한시하고 일에만 빠져 살았던 안 후보는 "2004년 대선자금 관리자로서 책임을 지고 투옥된 1년 동안, '노무현의 참모' 안희정이 아니라 '누구의 남편과 아빠' 안희정으로서 행복감을 느껴본 적이 없다는 것에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며 "그 이후 가족 관계가 더 좋아졌다"고 회상합니다. 교사였던 민 씨가 자신 때문에 '경력 단절 여성'이 된 것에 대해서도 안타까워 했습니다.  

부인에 대해 안 후보는 "가장 든든한 조언자이자 카운슬러"라며 "몇 해 전부터 여성주의 책들을 읽으면서 공부하고 있지만, 남성 중심 사회에서 교육받고 생활해온 탓에 아내를 통해 보는 세상의 반쪽 창이 더 소중하고 의미 있다"고 말합니다. 


▲ 둘째 첫돌 때 찍은 가족사진 ⓒ안희정


 

(안희정 후보가 바꾸고자 하는 미래 '세 가지'에 대한 이야기도 추후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