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뉴스

[피스보트] "우리는 '핵무기 숲' 속에서 살고 있다"(2006.12.19)

"원자폭탄이 떨어진 다음날 히로시마 거리를 시체를 밟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걸었다. 죽은 사람들을 향해 '죄송합니다. 저도 죽었어야 하는데, 아프시죠?, 뜨거우시죠?'하며 마음속으로 용서를 빌었다. 살아 움직이는 건 나 혼자였다. 살아 있는 내가 침묵하는 건 죄를 짓는 것이다."
  
  '2006 피스앤그린보트(Peace & Green Boat)'에 승선한 아마노 후미코(75) 씨와 곽귀훈(82) 씨는 미군의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에 의한 피해자다.
  
  원자폭탄 투하가 초래한 참상을 직접 경험한 이들은 오랜 세월 동안 핵무기 철폐 운동을 해 왔다. 이들은 15일 피스앤그린보트에서 피폭자 증언대회를 갖고 "핵은 누가 가져도 정당화될 수 없다"며 북한과 미국 모두 핵을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14살 때 히로시마에서 피폭을 경험한 후미코 씨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핵 반대 운동을 하고 있다. 그는 지난 1978년 제 1회 UN 군축 특별총회에 증언자로 참가했으며, 피스보트에도 여러 차례 승선해 피폭 경험을 증언한 바 있다. ⓒ 환경재단

  "내가 침묵하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다"

  
  후미코 씨는 14살 때 히로시마에서 피폭을 경험했다. 원자폭탄이 투하된 1945년 8월 6일, 그는 학생이었지만 정부의 동원령이 떨어져 일하고 있던 공장에서 그날을 맞았다고 한다.
  
  그가 기억하는 피폭의 순간은 하늘로 예쁜 분홍빛 반지 모양 구름이 솟구쳤고 굉음이 들려왔다는 것. 그는 그날 밤 불타는 히로시마가 내려다보이는 높은 바위 위로 피신했다. 그는 "나도 부모님과 가족들과 함께 죽고 싶었다"면서 엄청난 공포를 느꼈다고 밝혔다.
  
  그는 다음날 아침 가족들을 찾기 위해 히로시마 시내로 내려왔다. 건물이 모두 무너지고 불타버린 도시, 살아있는 생명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거리를 헤매면서 그는 처음으로 '전쟁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구나'하고 깨달았다고 한다. 병사들이 든 검은 총, 펄럭이는 일장기, 승전 소식을 듣고 기뻐 외치는 만세 등 일본 정부가 주입시킨 전쟁의 이미지는 이제 그를 더 이상 지배할 수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전쟁을 경험했지만, 처음 전쟁의 실체를 알게 됐다. 평화를 위한 전쟁은 있을 수 없다. 어떤 대의명분으로 포장할지라도 전쟁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그래서 살아 있는 나는 '침묵'할 수 없다. 똑같은 일이 되풀이 되도록 할 수 없다."
  
  후미코 씨는 21세기 전쟁은 히로시마의 원폭 피해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큰 재앙을 가져올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피폭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마음의 피폭자가 돼서 전쟁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재 3만2000발의 핵무기가 지구상에 존재한다. 이런 사실을 생각하면 우리는 핵무기의 숲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데 들이는 돈을 복지나 교육에 지원하면 지구상의 빈곤 문제가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또 핵문제는 환경문제와도 연관돼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것만 해도 215번의 핵실험이 있었다. 이런 파괴 속에서 지구 온난화, 쓰나미 등이 발생하고 있다.
  
  
▲ 곽귀훈 씨. 1944년 조선인에 대한 징병령으로 일본군에 징병돼 히로시마에서 피폭을 경험했다. 현재 한국원폭협회 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 프레시안

  "피폭자는 어디 있어도 피폭자다"

  
  한국원폭협회 회장인 곽귀훈 씨는 강제 징병돼 히로시마에 주둔하고 있던 부대 내에서 1945년 8월 6일을 맞았다.
  
  원자폭탄이 떨어지던 순간을 그는 "사진기 플래시의 몇 백만 배 정도의 빨간 빛깔이 천지를 뒤덮었다"고 기억했다.
  
  "그 다음 순간 갑자기 어둠이 몰려왔고 다들 흩어져 도망을 갔다. 나는 미군이 석유를 뿌린 뒤 수류탄을 떨어뜨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정신없이 달렸다. 근처 방공호에 도착해 윗옷을 벗으니 등판에 불이 붙어 있었다. 또 머리, 팔, 가슴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부서진 건물 파편이 온 몸에 박혀 상처를 입은 것이었다. 아픈 것도 모르고 달렸다."
  
  그는 원자폭탄 투하로 군 부대가 여기저기 흩어진 가운데 자신의 소속 부대를 찾아가기 위해 사흘 동안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히로시마 거리를 헤맸다. 그는 8월 9일 부대에 복귀했고, 그 뒤 병원으로 후송됐다. 그가 히로시마에 떨어진 게 원자폭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전쟁이 끝난 뒤인 8월 26일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피폭의 경험을 '그저 운이 나빠서'라며 체념하고 살았다. 하지만 1965년 한일협정을 통해 양국 간 교류가 다시 시작되는 것을 보고 한국으로 돌아온 피폭자들은 '한국원폭협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일본 정부를 대상으로 보상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자신들의 유일한 피폭국이라고 얘기하지만 당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한국인 8만 명이 원폭 피해를 입었고, 그 중 절반인 4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살아남은 피폭자 중 2만4000여 명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따라서 한국은 제2의 피폭국이다. 하지만 1965년 한일협정에서 일본 정부와 한국 정부는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그렇게 40여 년이 흘렀다."
  
▲ 히로시마 피폭 사진. ⓒ 프레시안

  원폭협회는 1970년대 초 일본 정부를 대상으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해 승소했다. 대법원은 "피폭자라면 외국인이든, 범죄자이든, 불법체류자이든 치료가 우선돼야 한다"고 판결했다고 곽 씨는 전했다. 그러나 한국인 피폭자가 동경도(都)에 '피폭자 관련 수첩'을 발부해달라고 요구했으나, 후생성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20년을 끌다가 곽귀훈 씨는 1998년 일본에 거주하는 자 외에는 '피폭자원호법'이 적용되지 않는 게 부당하다면서 손해배상을 제기했다. 그는 4년 간의 재판과정을 거쳐 2002년 12월 승소했다. 이 소송의 결과로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2300여 명이 매달 10여만 원씩 의료비를 보조받게 됐다. 곽 씨는 "피폭자는 어디를 가든 피폭자"라고 강조했다.
  
  그는 최근 북한의 핵실험과 관련해 "북한이 핵을 가져서는 안 된다"며 "일본이 이를 빌미로 국방예산을 확장시키고 있다"고 우려를 표명했다.
  
  "이 상태로 가면 일본은 핵무장을 하려고 할 수도 있다. 아시아에서 군림하는 일본을 만들려는 것. 우리는 그게 가장 두렵다."
  
  후미코 씨와 곽귀훈 씨는 지난 13일 일본 후쿠오카에서 피스앤그린보트 출항 기자회견에 참석해 핵무기 근절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번 피스앤그린보트의 구호는 "No more nuke! No more hibakusha!"(핵 반대! 피폭자 없는 세상!)이다.
  
▲ ⓒ 프레시안

  
▲ ⓒ프레시안

  
▲ ⓒ프레시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