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터뷰] <유전자 지배사회> 저자 최정균 카이스트 교수
"인간은 유전자를 전승하는 생존기계이다."
"내가 유전자를 소유하지 않는다. 유전자가 나를 지배한다."
"자연이 아름답고 숭고하다는 것은 착각이다."
"유전자의 번식 욕구에 기반한 사랑은 고귀하지도 신성하지도 않다."
"다른 인종이나 소수자에 대한 편결과 차별 역시 거의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며, 이들을 기피하고자 하는 유전자의 '두려움'은 혐오라는 감정으로 발현된다."
최정균 카이스트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가 쓴 책 <유전자 지배사회>(최정균 지음, 동아시아 펴냄)에 나오는 생물학적 '사실'들이다. 최 교수는 '이기적 유전자'의 지배를 받는 '자연적 인간'은 결코 선하지 않다고 강조한다. '사회성 동물'이라고 불리는 개미, 벌 등의 희생적 행동도 혈연에 의해 이뤄지는 이기적 유전자의 소행이며, 인간의 이타적 행동에는 반드시 의식적 노력이 동반된다.
최 교수는 이 책에서 찰스 다윈의 진화론 이후 눈부시게 발전한 유전학, 생물학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사회, 경제, 정치, 의학, 종교 등에 대해 설명한다. 그는 "불평등한 경제, 혐오 정치, 착취 사회, 능력주의 문화 등 현재 인간 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많은 문제들은 유전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인간은 이기적", "자연은 적대적", "창조주는 없다" 등 도발적 언술을 통해 최 교수가 전하려는 메시지는 "과학을 통해 창조하는 신적 존재로서의 인간과 그들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다. 현재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대다수의 문제와 부조리는 무의식중에 행해지는 이기적 유전자 작동에 기인하고 있으며, 이런 유전자가 심어놓은 본성은 인류가 알아내고 싸워야할 우리 내부의 자연이다. 사회, 경제, 정치, 종교 등 인류 문명에 대한 탐구는 지금까지는 소홀했던 이런 과학적 발견들 위에서 논의돼야만 인류의 진정한 '진보'가 가능하다고 최 교수는 강조한다.
다음은 6월 25일 진행된 최정균 교수와 인터뷰를 정리한 내용이다.
(이 인터뷰는 추후 영상(https://www.youtube.com/@CooPEEC)으로도 공개됩니다. 편집자)
유전자의 구성물로서 '실존적 인간'을 둘러싼 '적대적 자연'
프레시안 : 리처드 도킨스는 "인간은 유전자를 전승하는 생존 기계"라고 정의했는데, 인간은 어떤 존재라고보시나요?
최정균 : 모든 생명체가 유전자의 구성물이고 전달체라는 건 이제 생물학적 사실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다윈 이전에 생물을 바라보는 관점은 본질주의적이었습니다. 다윈의 진화론은 그런 본질은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개체는 하나하나의 변이로, 객체로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이 무엇이다라는 생물학적인 본질은 없습니다.
프레시안 : 내가 유전자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유전자가 나를 지배한다, 그래서 내 유전자는 내 것이 아니다, 유전자는 공공의 자산이라고 설명하셨어요. 그런 생각을 바탕으로 사회적 차별, 능력주의, 공정 등의 개념을 비판했습니다.
"학업성취도는 유전자의 강력한 영향력 하에 있다…'유전자 로또'에 당첨되어, 그리고 여러가지 유리한 사회 환경 덕분에 고등교육을 받고 좋은 직장에서 놓은 보수를 받는 것은 단지 운이 좋았던 것 뿐인데 이것을 '재능'과 '노력'이라는 단어로 정당화하는 것이 과연 공정한 것인지 생각해볼 문제다."(48쪽)
최정균 : 생물학적으로 인간은 유전 정보로 이뤄져 있는데, 그 유전 정보는 부모로부터 온 거고, 거슬러 올라가면 어떤 생명체도 유전자를 만들어낸 적은 없어요. 유전자 변이도 어떤 에너지가 들어가서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오류에 의해서 우연히 발생합니다. 그래서 유전자는 소유를 논할 수 없죠. 자기의 소유가 아닌 유전 정보가 주는 '능력'들로 사회적인 우위를 점해서 특권을 가질 때 그게 과연 정당한가요.
이제 유전자 조작의 시대가 코앞에 왔어요. 일부 희귀질환에 대해 유전자 조작 치료가 승인이 됐고, 더 나가면 유전적으로 디자인된 아기들도 만들어질 수 있는 시대가 곧 옵니다. 만약에 유전자를 각각의 소유로 귀속을 시킨다고 하면 경제적인 부는 영구적인 유전학적 특권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반대로 유전병을 다룰 때 유전자 치료제가 굉장히 비쌉니다. 그래서 치료를 못 받는 사람도 있는데,유전자가 공공의 소유라고 보면 이를 공공적으로 치료해야 한다는 사실이 받아들여질 수 있죠. 관념적인 차원에서 능력주의의 문제도 있지만, 앞으로는 이런 실질적인 차원에서도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학업성취도에 영향을 주는 유전학적 변이의 57%가 비인지적 자질들에 의해 설명된다. 즉, 노력할 수 있는 자세마저도 유전자의 영역 안에 있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재능이든, 노력하는 태도든, 단지 훌륭한 유전자를 타고난 것에 대해 사회가 과도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분명 부당해 보인다.(102쪽)
"고통을 유발하는 질병도, 사회적인 차별을 유발하는 형질도, 남들보다 우월한 재능이나 능력도 모두 개인이 아닌 인류가 함께 짊어지거나 누려야 할 만인 공리물이다…열성 유전자에 대해서는 공중 보건과 같은 의료적 구조 체계가 필요하며, 경제력을 비롯한 사회적 특권을 이용해 우성 유전자를 획득하고 소유하려는 행위는 규제해야 할 것이다." (161쪽)
자연이 숭고하다는 착각…인간은 이미 자연을 넘어섰다
프레시안 :책에서 "자연이 아름답고 숭고하다는 것은 착각"이다, "자연은 적대적"일 수 있다, "자연에 맞서는 인간 해방" 등을 말씀하셨는데, '공생'도 있는 것처럼 인간과 자연, 인간과 다른 동물의 관계가 적대적인 것만은 아니지 않나요?
최정균 : 생명체와 자연은 상호작용하는 게 아니고 생명체가 자연에 적응하는 것입니다. 자연이 적대적이라는 관념을 숫자로 따져보면, 지구상에서 생명이 탄생한 이후에 대멸종이 다섯 번이 있었어요. 다섯 번의 멸종 때마다 75%에서 95% 종이 사라졌습니다. 포유류의 경우 각 종의 평균 지속기간은 100만 년에 불과합니다. 현생 인류는 호모 사피엔스지만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 호모 에렉투스, 호모 하빌리스,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 등도 존재했지만 멸종했죠.
다른 동식물들과의 관계도 인간이 반려동물, 식물 등을 기르기도 하지만 우리가 먹어 치우고 있는 동식물의 양을 생각하면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공생관계를 하나 꼽으라고 한다면 유의미한 건 우리 몸에 있는 미생물인데, 이는 서로가 서로를 돕는 관계라기보단 우리 몸에 해롭지 않기 때문에 면역체계가 허용한 것입니다.
프레시안 : 종교에 대한 설명에서도 이런 자연관이 엿보입니다. 기독교의 창세기에 대해서 이렇게 해석을 하셨어요. "자연을 객관적 대상으로 대면, 탐구, 활용해서 오늘날 자연과학을 추구할 수 있는 사상적 발판을 제공"했다. 이런 "창조를 실천하는 존재로서 예수"를 상정했고, "예수를 본받으려는 존재가 신적인 인간"이라고 쓰셨어요. 굉장히 논쟁적인 주장입니다. 과학자들 사이에서도 신의 존재 여부는 입장이 다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창조란 태초에 일어난 일회적 사건, 즉 자연 세계의 발생이 아니라 이러한 인간 세상을 만들어가는 진보적 창조다. 그러한 의미에서 진정한 창조주는 초월적 신이나 조물주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다. 성서는 자연의 노예였던 인간들을 예수를 본보기 삼아 스스로 신이 되는 해방의 길로 초청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성은 어떤 절대적인 초인을 통해서가 아니라 인류 공동체로서만 발휘된다." (240쪽)
최정균 : 언뜻 논쟁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사실 우리가 이미 그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간은 이미 자연을 넘어서는 존재가 됐습니다. 제 책의 마지막에 얘기했던 경구 피임약도 당시에는 교회에서 '죄'라고 극렬하게 반대했지만, 지금은 여성들이 자신의 생식을 피임약으로 통제하고 있습니다. 이미 자연적인 생식에 거슬러 살고 있고, 의학의 발전으로 과거에는 죽었을 사람들도 살아남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과학기술의 발전 방향성에 대한 가치관이나 세계관을 정립해야 될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는 빠르게 발전하는 과학기술에 몸을 맡기고 흘러온 것에 불과합니다. 과학기술이 나아가는 방향에 대한 종교적 고찰은 거의 없었다고 봅니다.
또 인간이 자연을 극복한다는 것에는 인간의 본능도 포함됩니다. 유전자의 지배로 인한 인간의 이기심, 혐오, 차별, 불공정 등도 극복해야할 대상입니다. 우리가 외부의 자연과 내부의 자연 모두를 극복해야 하는데, 지금까지는 후자에 대해선 좀 소홀했죠.
"개체들 간에 일어나는 약육, 강식의 생존, 본능과 사회적 갈등뿐만 아니라 개체 안에서 일어나는 생물학적 비극 역시 궁극적으로 자연의 문제다. 그럼에도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연을 경외하고 선망하며 많은 문제에 대해 인간 자신을 탓하는 가운데 문명의 진보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을 갖는다."(195쪽)
과학을 통해 창조하는 신적 인간의 한계는?
프레시안 : 과학을 통해 인간은 창조를 하는 신적인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에 대한 경외심을 갖는 것은 생명, 즉 삶과 죽음을 권장하기 때문입니다. 신적인 인간은 어디까지 창조할 수 있다고 보나요?
최정균 : 과학자들이 작은 미생물이지만 실험실에서도 생명을 창조하는 것에 성공한 사례도 있습니다. 기술적인 난제가 많지만 과격한 상상을 하자면 인간도 합성할 수 있죠. 생명을 창조하는 것이 인간으로서 이제 신의 영역에 들어가는 것이냐, 그렇게 해도 되는 것이냐는 질문인데, 이에 앞서 저는 자연에서 생명은 신성하냐는 질문을 해보고 싶습니다.
인체 유전학이 발전한 이유는 이미 자연 속에 돌연변이들이 다 있기 때문이죠. 우리가 실험하지 않았지만 수십억 인구 안에 자연적으로 생긴 변이들이 다 있고, 질병을 가진 사람들을 모아서 그들의 변이를 탐구하는 게 실험동물에게 인간이 인위적으로 변이를 만들어서 탐구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자연적으로 생기는 생명은 사실 자연이 행하는 생체 실험입니다.
인간이 감히 생명을 창조할 수 있냐고 말만 놓고 보면 위험하게 들리지만 좀더 깊이 생각해보면 자연이 행하는 생체 실험도 엄청나게 무작위적이고 가혹합니다. 인간이 신약 개발 등의 과정에서 실험실에서 임상실험을 할 때는 윤리적이고 과학적으로 매우 진지하게 접근합니다.
과학, 무지, 편견, 그리고 불평등
프레시안 : 코로나19로 팬데믹을 겪으면서 일부 대중들이 종교적, 정치적 편견 때문에 '백신 음모론'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대중들이 과학 기술에 대해 불신을 갖는 이유는 무지나 편견 때문만은 아닙니다. 과학도 진공 상태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과학기술이 내게 이롭지 않을 것이다, 결국 가진 자들의 편이 아닐까 하는 불신도 있습니다.
최정균 : 그래서 결국 우리가 경계해야 되는 건 과학이 아니라 정치, 경제입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대중의 무지와 편견이 가장 걱정이 됩니다. 우리가 과학기술로 얻은 혜택과 폐해를 따져보면, 사실 무슨 폐해를 얻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에 비해 과학기술로 얻은 혜택은 어마어마하게 많지만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죠. 이런 부분을 좀 균형 있게 봐야 합니다.
"우리 앞에 놓은 자본주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경제학을 자연과학에서 정치학의 영역으로 되돌려 '정치경제학'이라는 이름을 되찾는 것에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올바른' 정치로 말이다."(114쪽)
프레시안 : 책을 읽으면서 "사이보그 선언"을 쓴 과학 철학자이자 페미니스트인 도나 헤러웨이가 생각이 났습니다. 사이보그 페미니즘은 여성이 생물학적으로 주어진 숙명, 임신과 출산에서 해방되는 것이 진정한 해방이라고 보면서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을 해체하려고 했습니다. 생물학적으로 여성은 임신과 출산 때문에 불리하게 진화됐다고 쓰셨는데, 과학적으로 어떻게 극복하는 게 맞다고 보시나요?
최정균 : 굉장히 많은 문제들이 자연 생식, 유성 생식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합니다. 여성들이 출산 과정에서 겪는 것도 있지만, 자연은 여성들에게 매달 애 낳을 준비를 시키고 여성들은 이로 인해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인공적인 생식을 하는 것이 궁극적인 자유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사이보그 페미니즘은 여성 정체성에 대해 남성의 성적 욕구가 투영된 허구라고 보면서 비판했습니다. 현대 과학기술 사회에서 사이버네틱스를 통해 정체성을 재구성하는 과정은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더 확장해서 인간의 정체성 자체에도 적용될 수 있는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성별, 성정체성, 인종 등의 교차성의 문제는 페미니즘을 넘어서 휴머니즘으로 확장해 논의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컨실리언스, 통섭…유전자 조합으로서 인간에 대한 철저한 탐구가 필요하다
프레시안 : 일란성 쌍생아는 유전자 조합은 똑같지만 사실 다른 삶을 삽니다. 외부 조건에 대한 반응들이 다를 수 있고, 이게 쌓여서 만들어지는 그 사람의 인식 체계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 인식 체계에 초점을 맞춘 것이 인문학입니다. 기존의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이 이 부분에만 초점을 맞추고 유전자 조합으로서 인간에 대한 이해를 도외시했다는 것이 이 책의 문제의식입니다. 그런 면에서 에드워드 윌슨의 컨실리언스, 최재천 교수의 통섭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보여집니다.
최정균 : 일란성 쌍둥이가 다른 환경에 대해서 다르게 반응하고 살아가죠. 그런데 같은 환경에 대해선 거의 동일하게 반응을 할 겁니다. 유전적으로 다른 두 사람은 같은 환경에 대해서 다르게 반응을 합니다. 유전자가 환경이나 외부 자극에 대한 우리의 반응까지 조정하고, 결국 인식 체계도 독립적이지 않습니다.
인문학, 사회과학에서는 생물학적 인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특히 자연적인 인간에게 존엄성이 내재해 있다, 도덕성이나 이타성이 있다는 믿음이 아직도 너무 굳건한 것 같아요. 자연적인 인간은 동물적인 인간이라는 부분이 인정 되고 그 기반 위에서 학문적인 탐구가 이뤄져야 된다고 봅니다.
유전자가 이끄는 '사랑'과 '혐오'를 넘어선 사랑이야말로 숭고하다
프레시안 : 사랑과 혐오라는 감정도 유전자가 번식과 생존을 위해 만들어낸 신경기관의 매커니즘이다, 그 자체로는 둘 중 어느 것도 숭고하다고 쓰셨어요. 혐오를 이겨내는 사랑이야말로 가장 숭고한 사랑이라는 주장은 매우 공감이 갔지만, 한편으론 얼마나 힘든 일인가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우리가 '동물'로서 하는 번식을 위한 사랑은 유전자가 이끄는 자연스러운 감정에 본능적으로 따르는 것에 불과하며, 우리가 '인간'으로서 유전자에 맞서 추구할 수 있는 사랑은 진화적 본능에 새겨진 두려움과 혐오를 이겨내는 것이다. 혐오라는 감정, 그것이 인식의 영역으로 확장되어 나타나는 고정관념과 편견, 그리고 그것들이 사회적 관계에서 실제적으로 표현되는 배제와 차별과 낙인,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사랑이 인간 고유의 숭고한 행위라고 말할 자격을 얻게 될 것이다." (76쪽)
최정균 : 우리가 번식을 위한 사랑이 덧없다는 것을 빨리 깨달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남녀간이나 부모 자식간의 마음 등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미학적인 부분은 소중하죠. 그러나 동시에 관념적으로나 철학적으로나 많은 고통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지금 젊은 세대들 중 일부는 결혼을 회피하고 있고, 우리나라 뿐 아니라 전세계적인 추세입니다. 조사 자료들을 보니까 남성 호르몬이나 정자 수가 급격하게 감소하고 있어요. 정자는 50년 동안 50%가 감소했다고 하니까, 지금 남성들의 평균 정자 개수가 50년 전 남성에 비해서 절반 밖에 안 된다는 겁니다. 진화적으로 보기엔 너무 짧은 기간이라서 문화나 인식적인 차원에서 번식에 대한 욕구가 제어가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인류의 종속을 논해야될 상황이고, 그런 점에서 자연 생식에 계속 의존을 해야되느냐라는 질문에 또 다른 관점에서 도달하게 됩니다.
기술적으로는 체세포를 줄기세포로 바꾸고 줄기세포를 정자나 난자로 바꿀 수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자가 수정도 가능해서 자신의 몸에 있는 세포만으로 자식을 만드는 것도 가능하고 동성 간의 결혼도 당연히 가능하고, 지금 기술적인 병목은 인공자궁입니다. 이렇게 생식과 가정에 대한 개념이 바뀌게 된다면 사랑이라는 감정도 인간 대 인간으로 좀더 자유로워지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혐오와 공격성 문제는 반응적인 부분과 주도적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반응적인 부분은 본능적이고 공격성을 발현할 때도 즉각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하고, 주도적인 부분은 사전에 모의하고 계획을 세워서 누군가를 죽이는 것처럼 발현되는 공격성인데, 이는 사람과 침팬지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납니다. 혐오가 고정관념, 편견, 공격성으로 발전을 하는데 반응적인 부분은 당장 통제하기 어렵겠지만 주도적인 부분은 제도나 정치를 통해 억제할 수 있습니다.
착취 개념조차 정의하지 못하는 경제학, 불균형으로 붕괴하는 자본주의
프레시안 : 유전학에 기반해 자본주의가 기반하고 있는 사적 소유에 대한 개념의 부당함을 설명한 부분은 수긍이 갔지만, 무한에 가까운 소유와 축적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번식 경쟁'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지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최정균 : 유전적인 배경만으로는 설명하기엔 과도하게 탐욕적이라는 지적은 동의합니다. 왜 그럴까라는 부분에 있어 한나 아렌트가 이런 설명을 했는대요. 고대 그리스에서는 가정이라는 사적인 영역이 있고, 폴리스라는 공론화된 영역이 있어서 사적 영역과 공론 영역이 철저히 분리돼 있었다. 그런데 집단이 점점 커지면서 이 두가지가 섞이기 시작했다. 부의 축적이라는 사적인 가정 활동이 사회 안으로 공론화가 됐다. 그러면서 부의 축적이 가속화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부동산, 주식, 대중 예술과 스포츠, 그리고 이른바 '혁신' 기업들의 시장에서 지대라는 형태로 교묘하고 광범위하게 이뤄지는 가치 착취 행위는, 그저 운 좋게 유리한 위치를 선점함으로써 다른 개체들이 자원을 이용할 기회를 빼앗는 생태계 경쟁의 모습을 그대로 되풀이 한다."(115쪽)
"집단이 아니라 개체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자연선택이라는 진화 원리는 착취 행동에 문제의식을 갖지 못하는 '나 홀로 사회'를 초래했는데, 주류 경제학에서는 이런 착취 개념을 정의조차 하지 못한다. 그 결과 지금 우리는 불균형으로 붕괴되어 가는 자본주의 세계를 목도하고 있다."(115쪽)
자연을 정당화하는 보수, 자연에 저항하는 진보
프레시안 : 보수와 진보라는 정치 성향도 유전자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고 보셨는데, 그 함의는 무엇입니까?
"생물학적으로 정의할 때 보수란 성공적으로 진화한 유전자들의 발현이자 자연이라는 원초적인 체제에 대한 정당화이며, 진보란 진화로부터의 일탈이자 자연 체제에 대한 저항과 도전이다."(146쪽)
최정균 : 보수와 진보는 문화적인 요소도 들어가 있지만 인간이 가진 유전학적인 성향입니다. 사회과학적으로는 보수나 진보를 일관성 있게 설명하기가 쉽지 않은데 생물학적으로는 가능합니다. 자연적 가치를 수용하는 쪽이 보수이고, 진보는 거기에 저항합니다. 보수적 성향의 사람들은 더 큰 편도체를 갖고 있고 교감신경이 더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신경전달물질로 보면 보수는 세로토닌, 진보는 도파민의 분비가 높습니다.
그 결과로 보수는 위험을 회피하는 성향이 높아 진화적으로 보면 더 잘 살아남을 수밖에 없어요. 번식, 사회적 서열, 생활적인 측면에서 훨씬 영리합니다. 이에 반해 진보적인 사람들은 공부는 잘하지만 헛똑똑이들인 경우가 많죠. 그래서 보수나 진보가 우월의 개념도 아니고 유전자에 의해서 주어진 속성이기 때문에 개인을 책망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닙니다. 보수는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밖에 없는 뇌의 회로가 있는 거고, 진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면에서 서로 좀더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는 여지가 생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자연을 극복하고 나아가는 게 가야할 방향이라고 한다면 보수적 셩향은 이해는 하더라도 극복해야 하는 문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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