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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노무현

"소박 맞은 노무현?"(2002.9.16)

"소박맞은 노무현 후보."

지난 15일 한나라당이 발표한 논평 제목이다. 민주당 한화갑 대표가 노무현 대통령 후보의 선거대책위원장을 고사하고 선대위와 당을 2원화하기로 두 사람이 합의한 것을 비꼰 표현이다. 

노 후보측은 18일께 기자회견을 갖고 선대위 구성 원칙 등을 밝힐 예정이다. 그러나 선대위나 당 공식기구를 이원화하기로 한 이상 선대위에게는 실질적인 예산 집행권이 없어 무력화될 가능성도 배제하기 힘들다. 

게다가 16일 김원길 의원 등 비노 중도파 중진 등이 "추석후 대거 탈당"을 선언하고, 신당추진위(위원장 김영배)가 이날 해산을 결의하면서 사실상 노 후보의 사퇴를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민주당은 사실상 분당 위기에 처해 있다. 

노 후보 입장에서 보면 사면초가의 위기다. 

***한 대표측, "돈줄은 우리가 쥐겠다"**

노 후보측은 15일 한 호텔에서 심야 전략회의를 갖고 선대위 인선 및 구성에 대해 논의했다. 선대위는 '총리급 외부인사+재야ㆍ학계 거물+당내 인사'의 3인 공동체제가 유력시된다. 영입인사로는 이수성 전 총리, 변형윤 서울대 명예교수가 거론되었다 한다. 당내 인사로는 정대철 최고위원이 유력시되고 있다. 

김원기 이해찬 임채정 이상수 문희상 천정배 정동채 정세균 김경재 이강래 이호웅 허운나 이재정 의원, 유인태 전 의원, 염동연 이강철 특보 등이 이날 회의에 참석했다. 

노 후보 측은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선대위원장 인선을 추석 이후로 미루고 '총괄', '미디어', '인터넷', '정책' 본부장 및 '국민운동' 등 5대 본부장을 최고위원급 및 그에 상응하는 당내 인사들로 인선해 추석 전에 발표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문제는 당과 선대위가 이원화하기로 한 상태에서 노 후보 측은 "선대위가 당에 우선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한화갑 대표 측은 "당에 우선권이 있다"며 반대입장을 고수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자금 문제에 있어 "당헌상 선대위 권한에 재정문제는 명시돼 있지 않다"며 앞으로도 '돈줄'을 놓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노 후보의 아킬레스건, '돈줄'**

'돈줄' 문제는 사실상 대단히 중차대한 문제다. 

말로는 '법정 선거비용'만 쓰겠다고 하나 정치현실은 결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노무현 후보의 정치적 칼러때문인지 노 후보의 독자적 정치자금 동원력은 약하다는 게 정가의 일반적 전언이다. 노 후보 진영의 한 원로 의원은 "지난 4월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이 이회창 후보를 25%포인트나 앞섰을 때에도 재계는 침묵하며 관망하는 분위기였다"며 "요즘 들어서는 지지율마저 낮아지자 노 후보 개인에게 자금을 대려는 세력들을 찾기 힘든 게 사실"이라며 작금의 어려운 자금사정을 토로했다.

따라서 노 후보에게 절실한 것중 하나가 현재 여권이 비축해 놓은 대선용 자금이며, 앞으로 당을 통해 공급받을 재계의 후원금이다. 최근 LG-칼텍스가스의 경우를 통해 그 실체를 드러냈듯, 재계는 대선후보가 아닌 당에게 일정부분의 후원금을 공식으로 기탁하겠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돈줄을 노 후보 진영인사들로 구축될 선대위가 아닌, 한화갑 대표 등 당권파가 장악한다는 것은 노 후보의 독자적 대선운동을 가로막을 중차대한 걸림돌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특히 노 후보 캠프가 향후 선거운동을 '탈DJ'로 규정하고 있는 마당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한 예로 지난 13일 당과 선대위의 이원화 합의 과정에서 한 대표는 노 후보에게 "(자금 문제는) 걱정 마라. 장난은 안 친다"고 약속했다. 한 대표는 그러나 그후 노후보 캠프의 정대철 최고위원이 'DJ 가신세력의 일선 퇴진'을 주장하자, "말 같지도 않은 소리"라는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노 후보 진영이 계속해 DJ와의 결별을 추진할 경우 '돈줄'을 틀어쥐고 정면대응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김원길 의원, "추석 후 20명 정도 탈당"**

노무현 후보의 입지를 약하게 만들고 있는 또하나의 사건은 비노파의 탈당 움직임이다. "통합신당을 위해 탈당도 불사하겠다"던 김원길 박상규 등 비노 중도파 의원들은 조만간 당 외곽에 비공식 신당추진기구를 구성하고, 정몽준 이한동 의원 등 대선후보들과 연대협상을 벌이기로 했다. 

김ㆍ박 두 의원과 김영배 신당추진위원장, 김명섭 김영환 조성준 강운태 박병윤 박병석 의원 등은 지난 14일 밤 서울 여의도 한 음식점에서 만나 신당추진과 관련해 논의했으며, 상당수가 탈당을 단행하기로 의견을 모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 민주당 김원길 의원은 16일 아침 SBS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추석 뒤 통합신당을 창당할 수 있는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우선 20명 정도 민주당을 탈당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 의원은 "당장 탈당을 각오한 의원은 12~13명이며, 시간을 두면 중도파에서 20명이 탈당할 것"이라면서 "반노 진영까지 합치면 (탈당자가) 2배쯤 된다"고 덧붙였다.

김 의원은 또 정몽준 의원이 창당하는 신당에 합류할 가능성에 대해 "정 의원의 대선출마 선언 이후 충분히 논의할 수 있다"며 연대의사가 있음을 밝혔다. 

또 한국미래연합 박근혜 대표와 이한동 의원과의 연대에 대해선 "누군든 관계없다"면서도 "통합 신당은 국민이 바라는 진짜 정당이 돼야 하며 정체성에 대한 합의는 이뤄져야 하므로 의견이 맞지 않는 분들이 들어오는 것은 맞지 않다"고 덧붙였다. 

***신당추진위 노무현 후보 비난하며 해산 결의** 

이와 같은 맥락에서 비노파가 중심을 이루고 있는 민주당 신당추진위는 16일 오전 당사에서 결산회의를 갖고 "그동안 추진해온 통합신당 노력이 좌절됐다"며 해산을 결정했다. 

김영배 위원장은 17일 한 대표와 조찬회동을 갖고 신당추진위 해산결정을 통보할 예정이며, 최고위원회의와 당무회의에서 이를 수용하면 신당위는 최종 해산된다. 

김 위원장은 이날 성명서를 통해 통합신당 추진이 불가능하게 된 원인으로 "민주당이 대통령 후보를 비롯한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은 것"이라고 지적하고 "지금이라도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면 통합신당으로 정권창출이 성공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실상 노 후보의 후보직 사퇴를 촉구하는 내용이다. 

김 위원장은 또 "뜻 있는 많은 의원들이 좌절하지 않고 국방 외교 안보 경제성장 등 대통령으로서의 애국심 자질 문제를 깊이 심사숙고해서 구국적 결단이 있을 것"이라고 밝혀 신당추진위 해산에도 불구, 당내 중도파들의 통합신당 노력이 계속될 것임을 시사했다.

***한나라당, "모종의 시나리오 작동하기 시작한 게 아니냐"**

이같은 민주당내 핵분열 상황을 지켜보는 한나라당의 분위기는 일방적으로 반기는 것만도 아니다. 모종의 시나리오가 작동되기 시작한 게 아니냐는 긴장감이 더 크다. 

한나라당은 이번에 탈당을 추진중인 비노파가 서울ㆍ수도권ㆍ충청권 등 중부권 인사들로 주축을 이루면서 탈DJ성향을 표방하면서도 이들 비노파의 초기 결성 과정등을 볼 때 내부적으론 DJ와 뗄 수 없는 연관성을 갖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따라서 한나라당은 이들 비노파의 움직임이 경쟁력 약한 노 후보를 고사시킨 뒤 정몽준 의원으로 후보단일화를 하려는 청와대의 시나리오의 산물이 아니냐는 강한 의혹을 눈길을 보내고 있다.

한나라당이 15일 당 논평에서 노 후보에 대해 "소박 맞았다"는 표현을 쓴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과연 노 후보가 당 안팎에서 직면한 자금, 조직 등 각종 어려운 시련 속에서 '사즉생'의 결단을 통해 독자적 생존력을 지닌 후보로 거듭날 수 있을지, 지금 정계는 위기에 직면한 노 후보의 행보를 예의주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