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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더 이상 왜 맞았는지 묻지 말자"(2007.1.3)

'맞을 짓 했다.'
  
  가정폭력과 관련된 우리 사회의 오랜 편견 중 하나다.
  
  과거 가정폭력 사건을 신고한 여성에게 경찰이 "부부싸움은 알아서 해결하라"고 할 만큼 가정폭력에 대한 인식 수준이 낮았던 때와 비교하면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우리사회의 일차적 관심은 '왜 맞았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 같다.
  
  '왜 맞았나'에 관심을 갖는 태도는 '맞았다'는 사실 자체는 그다지 충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폭력에 대한 감수성이 그만큼 낮다고 할 수 있다.
  
  새해 벽두부터 언론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연예인 가정폭력 사건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다.
  
  결혼과 이혼 등 연예인의 '사생활'은 대중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소재인 데에다 결혼 12일 만의 파경에 이어 폭행 사실이 공개되는 등 충격적인 사실이 속속 밝혀지자 언론의 큰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명백히 가해자와 피해자가 존재하는 가정폭력을 양측 간 '진실공방'으로 몰아가는 언론의 보도 태도는 '가정폭력'이라는 사건의 본질을 가려 버린다. 이민영 씨도 폭력을 행사했는지, 구타로 인한 유산인지, 중절수술을 했는지 등 쌍방의 주장을 떠나 이민영 씨는 코뼈가 부러지고 두 눈에 크게 멍이 들 정도로 맞았고, 이찬 씨는 눈으로 확인되는 외상은 없었다. 언론의 이같은 보도 태도는 가정폭력을 부부 싸움 정도로 치부하는 오래된 편견을 재생산하는 것이다.
  
  두 가구 중 한 가구에서 '가정폭력'
  
  한국여성의전화연합(여성의전화)은 2일 논평을 발표해 "다른 사건과 마찬가지로 경위가 어찌됐건 명백한 가정폭력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누가 폭력의 빌미를 제공했느냐가 언론의 초점이 되고 흥밋거리로 전락하고 있는 것은 유감"이라면서 "언론에서는 부부의 진실공방이라는 타이틀로 가정폭력 자체가 아니라 원인을 두고 경쟁하듯이 이 사건을 보도하고 있지만 폭력의 원인이 누구였는지는 가정폭력의 본질과 다른 문제"라고 지적했다.
  
  여성의전화는 또 "피해자는 폭력을 당한 것만으로도 심한 상처를 입은 것임에도 상대 가해자의 변명을 기사화하며 양측의 공방을 흥밋거리로 전락시키고 있는 것은 피해자에게 제2차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라며 "이미 네티즌들은 양쪽 다 똑같다며 진절머리를 내고 있는 것이 그 반증"이라고 주장했다.
  
  또 연예인 가정폭력 사건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3년에 코미디언 이경실 씨, 2004년에 탤런트 최진실 씨, 2005년에 코미디언 김미화 씨가 가정폭력을 이유로 이혼하는 사건이 이어졌다.
  
  '이미지'를 중요시 하는 직업이라는 점에서 연예인 가정폭력이 더 알려지기 힘든 측면도 있지만 그만큼 우리 사회에 가정폭력이 만연해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여성가족부가 지난 2004년 실시한 '전국 가정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한 해 동안 배우자 폭력 발생률은 44.6%로 조사됐다. 또 결혼 후부터 현재까지 한 차례라도 폭력이 발생한 경우는 53.6%로 2가구 중 1가구 꼴이었다. 이 중 95%가 아내에 대한 폭력이었다.
  
  이경실 씨나 김미화 씨 사건에서도 잘 드러났듯이 가정폭력은 여성의 사회적 지위나 가정 내 경제적 기여도와 별다른 상관관계가 없다. 개인적 차원에서 예방할 수 있는 문제라고 볼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또 아내폭력은 자녀폭력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일반적이라는 점에서 더욱 성인과 성인의 문제로만 치부할 수 없다.
  
  가정폭력방지법이 제정된 지 올해로 꼭 10년이 됐지만 '솜방망이 처벌'로 유명무실한 상태다. 여성의전화가 가정폭력 가해자를 적정하게 처벌할 수 있는 내용 등을 포함한 개정의견을 국회에 제출했지만 2년이 지나도록 국회에서 처리되지 않고 있는 상태다.
  
  더 이상 여자 연예인의 멍든 얼굴이 스포츠 신문 1면을 장식하지 않는, 또 '왜 맞았는지'를 묻지 않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