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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박원순

"고문, 그 '야만의 역사'를 넘어서야 한다"(2006.10.27)

고통은 기록되기 어렵다. 몸에 가해지는 고통을 언어라는 매개를 통해 타인에게 고스란히 전달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고통당한 사람은 고통과 함께 몸에 각인된 공포 때문에 말하려 하지 않는다. 고통을 가하는 순간 고통을 가한 자와 고통을 당하는 자 사이에 권력 관계가 형성되며, 고통은 타인을 통제하는 수단이 된다.
  
  이런 이유로 고문은 인류 역사를 관통해 권력집단에 의한 통치 수단의 하나로 사용돼 왔다. 동시에 같은 이유 때문에 고문은 '아무도 기록하지 않는 역사'였다. 특히 한국 같은 나라에서는.
  
  "인간의 영혼은 질그릇처럼 약하다"
  
  박원순 변호사. 최근 많은 이들이 그가 혹시나 내년 대통령 선서에 출마하려고 준비하는 게 아닌지 샛눈을 뜨고 보고 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의 관심은 '권력의 달콤함'이 아닌 '권력의 씁쓸함'에 가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일제시대부터 노무현 정부까지 한국에서 권력집단이 자행했던, 아니 지금도 근절되지 않고 있는 고문을 낱낱이 파헤쳤다. <야만의 기록>1ㆍ2ㆍ3 (박원순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은 10년 가까이 치열한 고증과 추적 작업을 통해 나온 '국가 권력의 잔혹사'다.
  

▲ ⓒ프레시안

  "내 고등학교 동창 중에는 두 명의 구씨 성을 가진 친구가 있다. 한 친구는 민청학련사건 당시 고등학교 조직을 책임진 이른바 '고교책(責)'으로 활동하다가 매우 심한 고문을 받고 15년형을 선고받았다. 그 후에도 오랫동안 멀쩡하게 우리 주변을 오가던 그 친구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우리는 그가 어느 시골 정신병원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십시일반 돈을 모아 정신병원 치료비도 대고, 또 어느 땐가는 출판사에 취직시켜 잠시 일하게도 했지만 그의 병은 영원한 완치가 불가능한 듯하다.
  
  구씨 성을 가진 또 다른 친구는 고등학교 때인 1972년 무렵 유신반대 유인물을 뿌리다가 발각돼 포고령 위반으로 재판을 받았다. 너무 어린 나이에 군 수사기관의 폭력과 위협 앞에 놓인 그의 여린 영혼은 일그러졌다. 대학을 나오고 고등학교 선생까지 하던 그는 결국 정신질환이 도져 사회생활을 접고 유폐생활을 보내야 했다. 두 사람 모두 똑똑하고 리더십 있는 친구들이었다."

  
  
  
  어린 나이에 고문을 당해 평생을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던 두 명의 친구. 동년배의 소위 '운동권 인사'라면 갖고 있을 법한 이 같은 개인적 경험은 박 변호사로 하여금 고문의 역사에 천착하게 했다. 그는 "이 책을 정리하면서 수많은 고문사건과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다시 내 마음에 사그라졌던 분노가 일렁여 내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매일 악몽도 꾸었다"고 밝혔다. 70년대 학생운동을 하고 80년대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면서 고문 피해자들을 많이 접한 그에게 고문의 역사를 기록하는 일은 일종의 '씻김굿'이었던 셈이다.
  
  그는 고문의 상처가 개인에게 평생 간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인간의 영혼은 질그릇처럼 약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가 고문 피해자들을 잊는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범죄"라고 박 변호사는 항변한다.
  
  "고문 피해자 외면한다면 정권의 야만성 면할 수 없어"
  
  박 변호사가 이 책을 쓴 또 하나의 이유는 '밤하늘의 별처럼 고문 피해자들이 많은 나라'에서 정작 고문 피해자에 대한 지원과 대책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이 땅에서 그토록 많은 고문 피해자들은 한 번도 제대로 된 사회적 주목이나 정당하고 적절한 치유대책을 접해보지 못했다. 그에 앞서 고문 피해자들의 숫자와 현 상태에 대한 제대로 된 조사 한번 없었다. 고문 피해자들은 그저 온몸과 정신이 파괴된 상태로 암흑과 고통 속에 내던져졌고, 그 끔찍한 고통과 소외의 짐을 가족들만이 함께 감당해야 했다. 가족들은 한 사람이 육체적, 정신적 고통 속에 서서히 침몰해가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봐야 하는 또 다른 '고통'에 직면해야 했다.
  
  박 변호사는 "이 땅에서 벌어진 대부분의 고문 사건은 우발적인 사고라기보다는 국가기관의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범죄로 이뤄진 사건"이라면서 "가해자 개인에 대한 책임을 묻거나, 더 나아가 피해자가 아무런 조치 없이 방치되는 사태를 그대로 용인할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과거 고문피해자를 방치하고 정의를 바로 세우지 않는다면 지금의 정권도 아무리 민주적 절차에 의해 선거로 선출됐다고 하더라도 그 본질과 내용에서 야만성을 면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참여정부가 들어선 이후 과거 청산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친일문제, 한국전쟁을 전후한 민간인 학살문제, 의문사 문제 등에 대해 관심이 높아졌지만 고문문제에 대해서는 여전히 아무 관심도 없다"며 "정부가 먼저 과거 고문사건에 대한 전반적인 사실조사, 정부의 사과,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 또는 보상, 재심을 통한 원상회복 등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궁극적으로는 각성된 대중이 고문 근절한다"
  
  그는 아울러 국가가 이처럼 스스로 반성하고 고문을 근절하게 만드는 힘은 궁극적으로 각성된 대중들에게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고문과 가혹행위라는 반인륜적 범죄를 포함한 인권유린에 대한 감수성을 높여야 하며 우리 이웃에게 벌어지는 공권력의 불법적 행사에 대해 더욱 예민하게 관찰하고 반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664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이 책은 총 세 권으로 구성돼 있다.
  
  1권은 고문에 대한 사회학적.역사적 의미, 한국에서 자행된 고문의 양상, 고문피해자들의 고통과 가해자들의 현실, 고문에 관한 법제와 고문 방지를 위한 국제협약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2권과 3권은 각각 일제시대에서 박정희 정권까지, 전두환 정권에서 노무현 정권까지 자행된 고문사건과 인권침해 사례들을 담고 있다. 또 교정시설과 군부대, 그리고 미군에 의한 고문과 가혹행위 실태, 서양의 마녀재판과 한국의 국가보안법에 대한 비교 연구를 '부록'으로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