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피플

"분노와 혐오 바탕 거짓정보 심각…비민주적 지도자가 민주적으로 선출될 것"

두테르테에 맞서 싸운 노벨상 수상 언론인 "민주주의 끝장날 수도…2년 남았다"

 

"모든 것이 데이터다!"

2021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마리아 레사 기자는 이 말로 20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특별 강연을 시작했다. 필리핀 언론인인 그는 독립 인터넷 언론 <래플러(Rappler)>의 공동설립자이자 최고경영자(CEO)로, 민주주의와 평화의 전제조건인 표현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노력을 인정 받아 지난해 러시아 언론인 드미트리 무라토프와 공동으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래플러는 두테르테 정권의 '마약과의 전쟁' 과정에서 권력남용, 인권침해, 폭력, 권위주의 등의 문제를 집중 조명했고, 레사는 두테르테 정권에 의해 수차례 체포, 구금되는 등 탄압을 받았다.

레사는 두테르테 정권 뿐아니라 그의 지지자들로부터 살해, 강간 위협에 끊임없이 시달려왔다. 그의 얼굴과 남성의 성기를 합성한 사진이 소셜 미디어(SNS)를 통해 유통되는 등 노골적인 성희롱도 감내해야만 했다고 이날 강연에서 토로했다. 2021년 유네스코 조사에 따르면, 여성 언론인의 73%가 온라인상에서 공격, 위협을 경험했고, 20%는 실제 물리적 공격과 위협으로 이어졌다. 

'필리핀의 트럼프'라는 평가를 받았던 권위주의 정치인 두테르테는 일찍이 트럼프처럼 SNS를 통해 지지자들의 동원하는 '포퓰리즘 정치'에 능했다. 레사가 권위주의 정치인 뿐 아니라 페이스북, 트위터 등 빅테크 기업을 민주주의의 '적'으로 규정하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다. 

▲지난해 노벨평화상 수상자 마리아 레사. 그는 유네스코 길레르모 카노 세계언론자유상(2021), 세계신문협회 황금펜상(2018) 등도 수상했고, 2018년엔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이 뽑은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기도 했다. ⓒ프레시안(전홍기혜)
 

SNS를 통해 '자극적인 거짓말'이 '지루한 진실'을 압도...2024년 민주주의 붕괴 우려도

"모든 것이 데이터"라는 말로 강연을 시작한 레사는 두테르테, 트럼프 등 권위주의 정치인들이 SNS를 통해 어떻게 '가공된 현실'을 만들어 나가는지 설명했다. 

"그들은 언론, 언론인은 거짓말쟁이라는 주장을 통해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러면 게임은 끝난다. SNS에서 '지루한 진실'이 유통되는 속도는 '자극적인 거짓말'이 퍼지는 속도에 비해 6배 느리다. 26개의 '가짜 계정'이 300만 명의 유저에게 도달했다. 언론이 게이트키핑을 했을 때는 팩트가 보상을 받았지만, SNS에서는 사실보다 분노와 혐오에 바탕한 거짓 정보가 더 널리 퍼진다. 정보 생태계의 보상 체계가 완전히 변화하고 있다."

극우집단의 정치적 이익과 빅테크 기업의 기업이윤 추구 방식이 맞아 떨어져 무서운 속도로 확산되는 정치적 편가르기와 그에 기반한 혐오 정서는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 

레사는 다수의 연구자들이 이대로 가면 2024년에 민주주의가 끝장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래리 다이아몬드 스텐퍼드대 교수, 리처드 하센 UC 어바인 교수 등. 필자주)면서 "이제 2년 밖에 시간이 없다"고 시급성을 강조했다.

"올해 세계적으로 30개 이상의 대선이 있다. 정보 공작, 조작된 알고리즘 등으로 허위 정보가 난무하는 현실이 바뀌지 않으면 비민주적인 지도자가 민주적인 과정으로 선출될 것이다." 

2020년 대선 이후 트럼프 당시 대통령은 "선거 사기론"을 주장하면서 선거 결과에 불복했고, 급기야 트럼프 지지자들은 이듬해 1월 6일 국회의사당을 무장 점거하는 폭동을 일으켰다. 2년이 지난 현재도 트럼프와 열성 지지자들은 여전히 대선 패배를 시인하지 않고 있다. 이런 트럼프의 전략은 전 세계의 극우 정치인들에게 민주주의의 핵심인 선거 결과를 부정하는 '교본'이 됐다. 2024년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와 그 지지자들의 비중에 따라 민주주의 시스템 자체가 작동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을 것이란 우려가 전문가들 사이에서 나온다. 

기술, 저널리즘, 공동체..."선한 인간의 본성을 믿는다" 

이에 맞서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양심적인 세력의 힘은 미약하다. 레사는 '3개의 기둥'으로 기술, 저널리즘, 공동체를 꼽았다. 기술 조작을 감시하고 무화시킬 수 있는 기술, 이를 대중들에게 고발하는 저널리즘, 기술과 저널리즘의 가치를 지원하고 공유하고 소비하는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두테르테 정권에 누구보다 용감하게 맞섰던 레사는 저널리스트로서 이토록 이기기 힘든 싸움을 계속하는 이유를 "선이라는 인간 본성에 대한 믿음"이라고 설명했다. CNN 동남아시아 특파원으로 일하다가 기존 미디어의 한계를 느껴 독립언론을 창간한 그는 정치 권력 뿐아니라 자본 권력으로부터의 언론 자율성에 대해 역설했다. 

그는 현장에 모인 기자들에게 "새로운 저널리즘 모델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지난 14일 <래플러>를 통해 무라토프와 함께 발표한 공동 입장문에서 레사는 "21세기 뉴스룸은 정의와 권리를 증진하기 위해 그들이 봉사하는 지역사회의 다양성을 대표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새롭고 뚜렷한 길을 개척해야 한다"고 밝혔다. 

▲마리아 레사 특별강연은 20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한국언론진흥재단, 매일경제가 주관했다. ⓒ프레시안(전홍기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