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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가 당신을 노리고 있다

"세계 주요국가들 중 미국, 한국을 제외하고는 혐오표현을 규제하는 국가적 차원의 법을 갖고 있다. 일본도 2016년 '헤이트 스피치 억제법'이 만들어졌다."(홍성수 숙명여대 교수)

최근 故이희호 선생의 장례 기간에 고인에 대한 혐오표현을 담은 각종 게시물이 극우 사이트 '일베'에 다수 올라왔다. 여성운동가 출신인 고인의 영향으로 김대중 정부에서 여성부가 만들어졌다는 것이 주요 이유였다. 수능 만점자로 서울대 사회학과에 재학 중인 한 누리꾼을 포함한 일부 남성 누리꾼들은 차마 입에 올리기조차 거북한 농도 높은 여성혐오 발언과 사진 합성 게시물을 '일베' 등에 올렸다.  

이번 일 이외에도 5.18광주민주화운동 관련 망언, 세월호 유가족 비하 등 혐오 발언이 사회적 물의를 빚는 일은 어느덧 낯선 일이 아니다.  

"혐오시설, 혐오식품 등 개인적 선호의 문제로 다뤄지다가 이제는 '사회현상'으로 다뤄지는 혐오"의 문제를 논하기 위해 "디지털미디어시대 : 다시 '혐오'를 묻다"라는 제목의 토론회가 14일 연세대학교 성암관에서 열렸다. 

"혐오는 피해자의 사회참여권을 박탈한다" 

홍성수 숙명여대 교수는 이날 토론회에서 "지금 사회현상으로서의 '혐오'는 개인적 감정을 넘어서는 사회구조적인 문제로서 인식된다"며 "어느 한 개인의 특수하고 개별적인 감정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집단적이고 역사적이고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뜻한다"고 말했다. 

홍 교수는 혐오표현이 나쁜 이유에 대해 1) 피해자에게 심각한 정신적, 신체적 고통을 야기 2) 피해자들이 직장을 그만두거나 교육을 포기하거나 대인 접촉을 피하는 등 사회 참여권의 박탈과 공공선 파괴 3) 차별과 폭력에 대한 선동 등을 지적했다. 

이상길 연세대 교수도 "혐오, 증오표현의 핵심은 증오라는 감정 작용에 있지 않다"며 "핵심은 사회의 특정 구성원의 구성권을 차별하거나 배제하는데 있다. 차별을 정당화, 조장, 강화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문제"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사회적 구성권은 개인들에게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한번 주어졌다고 계속되는 것도 아니다. 지속적인 상호작용을 통해서 구성된다. 따라서 개인에게 이런 상호작용 속에서 권리를 가질 권리를 인정받는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과제"라면서 "혐오표현은 사회적 구성권의 지속적인 갱신, 흐름을 방해하고 중단시키는 행위"라고 덧붙였다. 

한편, 홍성수 교수는 남성 혐오 등 '다수자 혐오'가 가능한가의 문제에 대해 "혐오표현이 차별을 정당화 조장, 강화하는 효과를 갖기는 어렵기 때문에 혐오표현이 성립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혐오나 차별 관련법의 구체적인 조항을 보면, 여성, 이주자, 장애인 등 특정 대상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얘기하지 않고, 장애, 성별, 출신지역, 연령 등을 이유로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법조문상으로는 다수자 쪽에게 적용될 가능성도 배제되어 있지 않으며, 일시적, 국지적으로 그런 일이 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장애를 이유로 혐오를 금지하는 것이 장애인을 향할 때와 비장애인을 향할 때가 똑같은 문제라고 보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주장했다. 

혐오표현, 법적 대응이 최선일까? 

홍상수 교수는 그러나 혐오표현을 형사범죄화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했다. 그는 "형사범죄할 경우, 형사법상 금지되어 있는 혐오표현은 금지가 가능하지만, 그 외의 혐오표현은 금지가 불가능하다"며 "혐오표현을 규제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 중 형사법은 하나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어떤 개념이 법에 들어오는 순간 그것을 블랙홀이 된다"며 "혐오와 차별을 법으로 규제한다면 법의 논리로 처벌 가능한 것들만 선별되어 논의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유죄 판결을 받지 않은 혐오도 도덕적,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나쁜 것이 될 수 있는데, 무죄가 나왔는데 또 비난을 할 경우 수세적일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홍 교수는 "더 많은 표현, 더 좋은 사상으로 맞서는 것, 사회의 자정능력에 맡기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지만 혐오표현의 문제가 쉽게 해결되지 않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라며 "혐오표현의 해악을 그저 자정에만 맡길 수는 없다"고 '형성적 조치'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형성적 조치'는 혐오표현이 사회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여건을 만들어가는 긍정적인 조치를 뜻한다. 

이런 '형성적 조치'로 홍 교수는 1)공무원인권교육과 시민인권교육 등 교육 2)공공기관에서의 반차별적 시행 3)소수자(집단)에 대한 각종 지원 4)차별문제에 대한 조사.연구 5)스포츠.온라인 영역에서의 자율규제, 사기업.대학에서의 자율규제, 시민사회에서의 반차별운동 등을 제시했다. 

표현의 자유 vs. 평등권 

이준웅 서울대 교수는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더 강하게 혐오표현에 대한 형사범죄화를 반대했다. 이 교수는 "우리는 국가가 선하기를 바라지만 이를 가정하고 행동하면 안된다"며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를 예로 들면서 "정부가 나빠질 가능성을 염려하지 않으면 시민으로서는 순박한 발상"이라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시민사회의 소통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시민사회가 역량을 키워서 스스로 대처해야지, 억압적인 국가기구를 활용해서 대처하겠다는 것은 위험하다"며 우려를 표명했다. 

 

이 교수는 또 혐오표현에 대한 규제가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기본권인 표현의 자유를 제약할 수 있다며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려면 혐오표현 때문에 발생하는 사회적 해악을 입증해야 하는데 아직까지 어떤 위해도 잘 특정이 안 돼 있다"고 말했다. 

이 교수의 주장에 대해 김지혜 강릉원주대 교수는 "우리는 표현의 자유를 이미 법적으로 규제하고 있다"며 "기업들의 허위광고나 성희롱 발언 등은 취약한 사람들의 편을 들어 표현의 자유를 법적으로 규제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혐오표현의 해악에 대해 김 교수는 "민주주의의 근본인 평등에 어긋나는 사회적 해악을 끼친다"며 "혐오표현은 단지 균형으로서의 평등이 아니라 모두가 자유로운 인간의 존엄을 의미하는 실질적인 평등을 침해한다. 평등권은 민주주의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권리"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평등문제에서 우월한 지위에 있는 사람은 실제 현실이 불평등하다 하더라도 평등하다고 판단하는 경향, 착시현상이 있는데 이를 강화시키는 것이 혐오표현"이라며 "규제를 당해야하는 입장에서 규제를 하도록 하는 상황 자체가 혐오표현법을 만들기 어렵게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고 주장했다.  

홍성수 교수는 혐오표현의 해악 입증과 관련해 "협박죄의 해악도 입증된 바 없다. 조문상으로도 애매하지만 구체적인 판례를 통해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범주가 형성되어 있다"며 "해악의 입증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면 협박죄 같은 반례가 있다"고 말했다. 

손희정 연세대 젠더연구소 연구원은 "혐오표현이 시민들 사이의 소통의 장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며 시민사회의 자율적 규제만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손 교수는 "난민 문제와 관련해 난민 혐오를 조장하고 선동하는 '가짜 뉴스'를 유포하는 주체가 특정 기독교 집단이라는 사실이 언론 보도를 통해 드러나기도 했다"며 "이처럼 돈과 권력을 가진 슈퍼 파워가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가짜 뉴스'를 유포하는 것을 어떻게 규제해야 하냐"고 문제제기했다.  

차별금지법 제정이 시급하다 

이처럼 혐오표현 규제 방안의 수위를 놓고 참석자들의 이견이 존재했지만,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해서는 모두 찬성했다.  

홍 교수는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직장, 학교 등에서 혐오표현이 금지된다"며 "미국에서 인종차별을 직장에서 했다면 이는 해고사유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홍 교수는 "차별금지법이 제정된다고 해도 광화문 사거리에서 혐오 발언을 하는 행위 등 모든 혐오표현이 규제되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의 과제는 차별금지법 제정으로 집약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준웅 교수도 국가가 해야할 일로 '차별금지법 제정'과 '증오범죄 가중처벌' 조항 도입을 꼽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