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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전쟁이 끝나면 남자는 '영웅', 여자는 '매춘부'?"

[프레시안 books] 방글라데시 '비랑가나' 이야기 <작전명 서치라이트>


"너는 우리의 국민이 화환으로 우리를 맞아줄 것으로 생각해? 아니, 매리. 그런 일은 세계 역사에서 일어난 적이 없어. 전쟁이 끝나면 남자들은 영웅으로 칭송받지만 여자들은 타락했다는 말을 들어. 그냥 봐봐, 그들은 우리를 창녀로 만들 거야."

<작전명 서치라이트 -비랑가나를 찾아서>(샤힌 아크타르 지음, 유숙열 옮김, 이프북스 펴냄)는 1971년 방글라데시의 독립전쟁을 배경으로 한 다큐 소설이다. '비랑가나'는 원래 '용감한 영웅'이라는 의미의 단어로 전쟁 당시 파키스탄군에 억류됐던 여성들을 칭송하는 단어로 사용됐다. 파키스탄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방글라데시 정치 지도자 세이크 무집이 연설에서 "당신들은 우리들의 어머니, 용감한 비랑가나입니다"라고 말하면서 대중적으로 쓰여졌다. 

▲ <작전명 서치라이트 -비랑가나를 찾아서>(샤힌 아크타르 지음, 유숙열 옮김, 이프북스 펴냄) ⓒ이프북스

정치적 의미에서 비랑가나는 남성 전사들과 마찬가지로 추앙 받았으나, 현실에서 그녀들은 철저히 배제, 은폐됐다. "비랑가나라는 이름은 원한에 찬 벌레나 전염병 같아요. 마치 만지기만 해도 상처가 생기로 팔다리가 썩어 떨어져 나갈 것처럼 말이에요." 한국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1991년에 이르기까지 46년이나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것과 똑같은 이유에서다. 비랑가나는 가족들에게는 가문의 명예를 더럽힌 여성 취급을 받았으며, 마을 공동체에서는 '결혼 상대가 될 수 없는 여성'으로 여겨졌다. 

이 책의 주인공 매리엄은 전쟁 전 대학 교육까지 받은 엘리트 여성이었으나, 비랑가나로 파키스탄군에게 잡혀 강간, 감금, 폭행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은 뒤 정신질환을 얻게 된다. 전쟁이 끝난 후 남성들은 독립투사였든, 전범이었든, 모두 자신들의 일상을 다시 구축할 수 있지만, 비랑가나들은 그럴 수 없었다. 매리엄과 마찬가지로 고등교육을 받은 비랑가나 아누라다는 전쟁 후에도 끝내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라다라니'라는 이름의 성매매 여성으로 살다 죽었다.  

비랑가나들에 대한 '공식적인 추앙'은 '비공식적인 멸시'가 추동한 것이기도 하다. 방글라데시 정부 공식 통계로 9개월의 분쟁기간 동안 20만 명이 넘는 여성이 파키스탄 군인에게 강간당했다. 그리고 이들 중 2만 명이 넘는 여성들이 임신했다. 그런데 무슬림 남편들은 전시 강간을 당한 자신의 부인을 다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남편과 가족들로부터 버림 받은 여성들이 사회 문제가 될 조짐이 보이자 정부가 나서서 이 여성들을 국가 영웅으로 만들고 남편들을 설득하려 했지만, 정부의 이런 전략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방글라데시는 또 전시 강간으로 인해 임신한 여성들을 대상으로 낙태를 허용하는 특별법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임신 중절 시기가 지난 여성들은 출산을 선택했고, 이 아이들은 해외로 입양 보내졌다.  

"그건 생각만큼 쉽지 않았어요. 소녀들은 울고 소리쳤어요. 때때로 우리는 아기들을 엄마한테서 떼내기 위해 엄마들에게 약을 주사해야 했어요. 이 아기들은 파키스탄 군인의 자식들이기 때문에 이 나라에 있을 수가 없었어요. 만약 어떤 외국 국가가 제안한다면 우리는 그 아기들을 입양시킬 수가 있었던 거죠. 그래서 대부분의 아기들이 캐나다로 갔어요. 또한 스칸디나비아 국가로도 많이 갔어요." 

'적군의 아이'를 출산한 여성들은 돌아갈 곳이 없었고, 정부에서 지원하는 재활시설에 기거했다. "남편들에게 거부당하고 아버지와 오빠들에게 내쫒기고 아무런 장래 희망도 없는 이들 빈 자궁의 여자들이 세탁기를 돌리고 빵을 굽고 옷을 만들고 수를 놓아 손수건과 베개를 만들었다. 이것이 가난한 나라의 재활 프로젝트였다."


1971년 방글라데시에서 일어난 대규모의 전시 강간은 세계사적으로 두드러진 일은 아니다. '강간의 역사'를 집대성한 수전 브라운밀러는 그의 책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에서 "방글라데시가 점령당한 9개월간 인구 1인당 강간 발생 비율은, 1937년 난징시 점령 한달 동안의 강간 발생율보다 높지 않고, 제 1차 세계대전 첫 3개월간 독일군이 벨기에와 프랑스에서 거침없이 진군하며 저지른 1인당 강간율보다 높지 않으며,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소련의 모든 마을에서 여성이 겪은 범죄 숫자보다 크지 않다"고 주장했다. 

"전쟁에서 통하는 단순한 규칙이 있다면 바로 이기는 편이 강간한다는 것이다.(...) 강간으로 여성을 제압하는 일이 승리를 측정하는 척도이자, 군인의 남성다움과 성공을 증명하는 징표인 동시에 군복무에 대한 실질적인 보상이 되었다. (...) 남자들은 '내 여자'가 강간당한 일을 사실상 자기가 겪는 피배의 고통으로 전유해온 유구한 전통을 가지고 있다.(...) 강간을 통해 여성의 몸은 상징적인 전쟁터가 되며 승리자가 개선식을 벌이는 광징이 된다. 여성의 몸에 가하는 행위가 남자들끼리 주고 받는 메시지가 되는데, 한쪽에게는 승리의 산 증거이고 다른 쪽에게는 패배와 상실의 산 증거인 것이다."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수전 브라운밀러 지음, 박소영 옮김, 오월의 봄 펴냄)  


한국의 여성들도 예외가 아니다. 이 책의 옮긴이 유숙렬 이프북스 대표는 '옮긴이의 말'에서 이 책이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을 떠올리게 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2018년 서지현 검사의 폭로를 계기로 우후죽순처럼 '미투' 폭로가 이어졌다. 1971년 방글라데시에서 있었던 일들이 어떻게 비랑가나의 관점에서 역사로 새롭게 복원되는지 보여주는 이 책이 거의 50년 가까이 지난 2019년 한국에서 유효한 이유를 우리는 충분히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