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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

<백래시> 저자 팔루디 "백래시는 반드시 실패"

수전 팔루디는 1980년대 레이건 정부의 신보수주의 하에 진행된 페미니즘에 대한 거센 공격의 흐름을 보여주는 <백래시>(Backlash, 반격)를 쓴 미국의 언론인이자 작가다. 페미니즘 고전의 반열에 오른 이 책으로 팔루디는 1991년 퓰리처상을 받았다. 

수전 팔루디가 2018년 10월 한국을 찾았다. 페미니즘에 대한 남성 사회의 반격에 대한 그의 문제제기는 27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한국 사회를 분석하는데 매우 유용한 개념이다.  


수전 팔루디는 이데일리에서 주최한 W페스타 행사의 기조연설자로 한국을 방문했다. 행사 다음 날인 17일, 그는 한국의 페미니즘 연구자들과 만났다. 그는 김은실 이화여대 여성학과 교수, 조은 동국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손희정 문화평론가, 김주희 서강대 트랜스내셔널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 등 10여 명의 페미니스트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이 간담회는 서강대 트랜스내셔널인문학연구소에서 열렸다. 


▲ 수전 팔루디 ⓒ프레시안(전홍기혜)


 "트럼프 정권에서 끔찍한 백래시가 진행 중이다" 


팔루디는 이날 페미니스트 연구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한국과 마찬가지로 미국 사회 역시 트럼프 정부 들어 '백래시'가 진행 중이라고 지적했다. 

"트럼프 대통령, 또 그의 지지자들에 의해 여성혐오적 발언이 공개적으로 행해지고, 여성을 위한 의료서비스를 줄여나가는 등 여성정책에 대해서도 재앙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나는 11월 중간선거에서 트럼프가 정치적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팔루디의 이 발언에 트럼프의 11월 중간선거가 한국에서는 또 다른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에 대해 간담회 참석자들이 설명했다. 문재인 정권 들어 2018년 진행되고 있는 남한과 북한, 그리고 북한과 미국 사이의 평화를 위한 협상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11월 중간선거에서 이겨야 한다. 그래서 많은 한국 사람들이 자신의 정치적 지향과는 무관하게 트럼프가 중간선거에서 이기기를 바란다. 더 나아가 일각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2019년 노벨 평화상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이런 한반도를 둘러싼 특수한 국제정치적 상황에 대해 팔루디는 이해를 표하면서도, '트럼프 노벨 평화상' 주장에 대해서는 "전 세계의 다른 독재자들이 트럼프를 사랑한다. 사우디아라비아 반정부 언론인에 대한 암살이 발생했는데, 트럼프는 사우디 정부를 두둔하는 발언을 했다"며 강하게 반대했다. 최근 터키에서 사우디아라비아의 반정부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가 납치된 살해된 사건이 일어났고, 배후에 사우디 정부가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살해 당시 녹음된 음성 파일이 있다는 사실도 미국 및 터키 언론들을 통해 보도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트위터를 통해 "암살에 개입됐다면 사우디 정부가 나쁘다"는 아주 짧은 입장을 밝혔다가, 16일 입장을 번복하며 사우디 정부를 두둔하고 나섰다. (관련기사 바로보기)

특히 사우디 정부에 대한 트럼프의 두둔은 인준 과정에서 성폭행 미수 의혹에 휩싸였던 브렛 캐버노 미 대법관을 옹호하는 과정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더 문제적이다. 캐버노 대법관은 낙태를 반대하는 인사라는 점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그를 대법관 후보로 지명할 때부터 논란이 일었던 인사였다. 캐버노가 대법관이 되면 대법원 내 보수 대 진보가 5대 4가 되기 때문에 낙태 합법화 판결을 뒤집으려 하는 게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미국은 1973년 대법원의 '로 대 웨이드 판결'을 통해 낙태가 합법화 됐다. (관련기사 바로보기)


<백래시>에도 1980년대와 90년대 초반 낙태 합법화를 뒤집으려는 보수 세력의 집요한 공격이 나온다. 팔루디는 "낙태 합법화 판결이 있던 바로 그해에만 이 판결의 효과를 제한하기 위해 50여 개의 법안이 제안되었다. 1980년대에는 공화당 출신 대통령들이 점점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며 "하지만 낙태 반대 작전은 대중운동이 되지 못했고, 여러 차례에 걸친 여론조사는 미국인 다수가 낙태 합법화 판결을 지지함을 분명하게 보여줬다"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세력은 현재까지도 집요하게 이 문제를 공격하고 있으며, 트럼프 정부라는 그들의 입장에서 정치적 호기를 맞아 전력 투구를 하고 있는 셈이다.  


"소비 자본주의가 페미니즘의 성과를 가로챘다. 극복 방법은..."

또 팔루디는 <백래시>에서도 '소비 자본주의'의 문제에 대해 지적한 맥락에 대해 설명했다.   

"나는 자본주의와 페미니즘 사이의 역동적인 관계에 관심이 있다. 이에 대한 논의를 더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산업화 초기 집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여성 공장 노동자들이 터무니없이 낮은 임금에 대항하면서 최초의 여성운동이 태동했다. 이것은 조직화된 여성들의 힘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소비 자본주의는 여성들에게 '너는 집단의 일원이 될 필요가 없다. 너는 이 물건을 소비함으로써 개인적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생각을 계속 주입시킨다. 그럼 점에서 소비 자본주의는 페미니즘의 성과를 가로챘다."  

조직화된 여성들의 힘으로 확대된 여성들의 자유와 권리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선택하고 소비할 자유와 권리로 축소되어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다. 그는 <백래시> 15주년 기념판 서문에서도 소비 자본주의의 역습에 대해 강조했다.  

"자기 결정이라는 페미니즘 윤리는 자기 계발이라는 황금 사과로 변신했다. 이 자기 계발은 주로 외모와 자부심, 그리고 젊음을 되찾으려는 헛수고에 바쳐진다. 그리고 공적 주체라는 페미니즘 윤리는 언론의 관심이라는 황금 사과로 탈바꿈했다. 이제는 이 세상을 얼마나 많이 바꾸는지보다 이 세상의 틀에 얼마나 멋지게 맞춰 사는지에 좌우되는 인기를 좇고 있다."

참석자들은 팔루디의 이런 통찰에 대해 공감하면서도 비욘세, 엠마 왓슨 등 소위 셀럽 페미니스트들이 대중들에게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이나 일부 젊은 여성들이 탈소비주의적 성향을 보이는 흐름들에 대해 지적했다. 한국에서는 가장 소비지향적인 세대라고 할 수 있는 10-20대 젊은 여성 사이에서 '탈코르셋 운동'(여성들은 외모를 가꿔야 한다는 문화적 압박에 저항하는 의미의 외모 안 가꾸기 운동)이 자발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물론 팔루디가 <백래시>를 통해 강조한 것도 페미니즘을 저격하려는 백래시에 맞선 여성들의 반격이다. 하지만 그는 이런 여성들의 저항이 '개별화' 되고, '개인화' 되어서는 가부장제라는 시스템에 구멍을 내는 실제적인 혹은 유용한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고 강조한다. 


"1980년대는 '한 사람이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신조가 판을 치던 시대였지만 이 전략은 동등한 권리를 실현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반격의 벽을 계속 두들기는 것이 아니라 아예 없애 버리려면 여성들은 사적인 불만과 목표 이상의 것들로 무장해야 했다. 사실 여성들에게 각자 혼자서 싸우는 법을 가르치는 것은 다시 한 번 패배의 길에 들어서게 만드는 것과 같았다. 과거 여성들은 이목에 신경 쓰지 않는 당당한 의제가 분명하게 있고, 눈치보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대중이 동원되고, 어떤 상황에도 굴하지 않는 확신만 있으면 의미 있는 방식으로 저항할 수 있음을 몸소 보여 주었다. 지난 200년간 이 세 요소가 맞아 떨어진 몇 안 되는 경우에, 여성들은 전투에서 승리했다."


가부장제가 법과 제도를 통해 이 사회를 규율하는 시스템으로 존재하는 한 백래시는 필연적으로 반복될 수 밖에 없다. '페미니즘-백래시-페미니즘'의 반복 속에서 여성들은 조금씩 진전하고 있다는 것, 백래시는 결코 '평등'과 '존엄'을 추구하고자 하는 여성들을 가로막을 수 없다는 것을 팔루디와 그의 책은 이야기하고 있다. <백래시>가 나온지 27년, 여전히 그의 책이 주목받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