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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문재인, 중도노선이 아니라 9호선을 말하라(2012.4.23)

민주주의에서 정치는 말을 통한다. 정치가는 말을 통해 특정 문제를 공론화하고, 민의를 수렴해 정책에 반영한다.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정치가가 '무엇을 말하느냐'는 그 정치가의 철학과 노선을 반영한 매우 중요한 정치행위다.

민주당의 '고장난 레코드', 중도논쟁

4.11 총선 패배 이후 민주통합당에서 또 중도논쟁이 불거졌다. 총선 패배 원인이 중원을 비웠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김진표 원내대표가 선봉에 섰다. 그는 총선 직후 최고위원회의에서 "저부터 당의 외연을 넓히기 위해 중도개혁 세력까지 아우르기 위한 적극적 목소리를 냈는가 반성하고 있다"며 "진보적 개혁 과제도 중요하지만 그것도 구체적인 생활 정치의 실천과제로 피부에 와닿게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가 총선 과정에서 왜 목소리를 크게 내지 못했었는지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그는 지난 해 한미 FTA 비준안 날치기 처리, 조용환 헌법재판관 인준안 처리 실패 등으로 민주당의 '엑스맨'이라는 비판을 받았었다. 그로 인해 4.11 총선 공천 과정에서 관료 출신들은 민주당의 '정체성'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받았었다. 김진표 원내대표 본인도 공천 여부를 놓고 공천심사위원회와 당 지도부가 상당히 고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 그가 선거를 통해 살아 돌아와 자신을 비롯한 관료출신들을 코너로 몰았던 것이 총선 패배의 원인인양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사실 김 원내대표가 여당 원내대표와 협상에서 번번이 졌던 것은 그의 정체성도 문제였지만, 무능이 더 큰 문제였다고 보여진다.

▲ 19대 총선 당선자대회에 참석한 문재인 고문. ⓒ프레시안(최형락)
문재인 상임고문도 이런 김진표 원내대표와 보조를 맞췄다. 문재인 고문은 지난 19일 당선자 대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당이 중도 성향을 더 강화해야 한다"는 당 일각의 지적에 대해 "그런 이야기도 충분히 일리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당이 좀 더 폭 넓게 지지를 얻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기존의 보수나 진보 구도를 뛰어넘어 국민에게 희망을 줄 수 있어야 한다"며 "우리가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자성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번 총선 결과를 놓고 많은 전문가들이 '미래권력'으로서 박근혜 새누리당 위원장에 대한 평가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지난 4년 내내 이명박 대통령과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해온 그가 전면에 나서서 당 이름까지 바꿔서 치룬 선거였다. 야당은 'MB 심판'을 주장했지만, 여당은 사실상 '박근혜당'으로 탈바꿈해 버렸다. 동시에 심판의 대리인으로 나선 야당은 지리멸렬했고, 위기감이 팽배했던 여당은 일사분란했다. 야당은 패러다임과 전술에서 모두 크게 밀렸고, 그 결과 이길 수 밖에 없었던 선거에서 크게 졌다.

문재인 고문도 이런 선거 결과에 책임이 없다 할 수 없다. 공식적으로 대선 출마 의사를 밝힌 상태는 아니지만(총선 전날 <나꼼수>에 출연해 대선 출마 여부에 대해 "분명한 것은 국회의원 해보고 싶어서 이렇게 출마한 것은 아니다"고 발언한 것이 사실상 대선 출마 선언이라는 해석도 있다) 부산 선거를 진두지휘했다. 그러나 문 고문은 부산과 경남에서 자신을 포함해 3석을 건졌을 뿐이다. 물론 부산경남에서 40%대의 정당득표율을 얻어 이른바 지역구도에 균열을 가져왔다는 점을 성과로 지적하기도 하지만, 의석수만 따지면 기대에 크게 못 미쳤다. 특히 문 고문은 총선 과정에서 정수장학회 문제를 집중 거론하면서 박근혜 위원장과 맞장 떴고, 박 위원장은 총선 기간 동안 부산에서만 5번 유세를 하는 등 대응에 나섰다. 여야의 가장 유력한 두 대선 주자가 붙었던 게 이번 부산 총선이었고, 문 고문이 졌다.

왜 졌을까? 여러 분석이 있지만 야당이 '심판론'에만 의존했다는 게 중론이다. '과거'에만 의존했다는 것이다. 야당은 다수당이었던 여당과 이를 활용한 현 정부의 횡포에 대해 읍소했지만, 정작 유권자들에게 자신들을 다수당으로 만들어주면 무엇을 바꿀 수 있을지 설득시키는데 실패했다. 의석수만 늘려주면 무능했던 야당이 유능해져 '99% 서민의 삶'을 조금이라도 변화시킬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동의를 크게 얻지 못한 게 이번 총선 결과로 나타났다.

야당은 경제민주화와 보편적 복지를 내세웠지만, 이번 총선에서 정책 이슈는 한번도 전면에 등장하지 못했다. 이런 저런 원인이 있겠지만, 선거를 치른 당사자가 남의 탓을 하긴 힘들 것이다. 이슈를 점유하지 못한 것은 어쨌든 의지와 능력의 문제였다. 지난해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확인된 민심에 기반해 당이 전반적으로 '좌클릭'한 것은 맞지만, 이번 총선이 그렇게 '좌클릭'한 노선에 맞춰 치러진 선거였고, 선거 결과가 '좌클릭'한 정책에 대한 평가인지는 의문이다.

그런데 총선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중도' 논쟁이 나왔다. 그리고 총선 전까지는 '좌클릭'에 동의했던 당 중진급들이 너도 나도 "중원으로 가자"고 외친다. 자신들이 '좌클릭'했던 원인이 통합진보당에 지나치게 휘둘렸기 때문이라는 보수 언론의 분석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그 근거로 제시하면서 말이다. 총선 전까지 의석수로 따지면 89석이었던 민주당이 7석인 통합진보당에 마구 휘둘렸다는 걸 시인하는 건 그만큼 민주당이 자기중심이 없었다는 얘기다. 이러니 '정체성 혼란'이라는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이제 다시 중도로 간다면 민주당이 얘기한 경제민주화와 보편적 복지 정책은 구체적으로 어느 지점에서 얼마나 달라지는 것인가? 어느 누구도 답하지 못할 것이다. '중도논쟁'은 결국 탁상 공론이며, 당내 계파간 주도권 다툼일 뿐이다. 총선 패배 후 당내 첫 논쟁의 주제가 고장난 레코드처럼 반복되는 '중도-진보'라는 건 민주당이 진정 선거 참패에 대해 자성하고 있는가 의심하게 만든다.

MB의 민영화 정책에 맞서는 박원순 시장

총선에서 야당이 패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서울 지하철 9호선이 요금을 500원 올리겠다고 발표했고, 이명박 정부는 여론의 눈치를 살피던 KTX 민영화, 영리병원 도입 등 민영화에 다시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민영화의 폐해, 그것도 외국계 금융자본이 들어온 민영화가 실제 서민들의 삶에 어떤 부담으로 다가오는지 '지하철 9호선 사태'는 절감케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배경엔 민주당이 그토록 목 놓아 외쳤던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이명박 대통령의 실정이 놓여있다. 지하철 9호선을 포함해 많은 민자도로 사업 등에 투자한 맥쿼리를 놓고 이 대통령 조카 등이 연루된 정경유착 의혹도 나온다.

지하철 9호선의 갑작스런 요금인상 발표에 박원순 서울시장이 사장 해임 검토, 사업자 취소 검토 등의 초강력 카드를 꺼내 들었고, 여론은 절대적 지지를 보내고 있다. 박 시장은 더 나아가 우면산 터널 등 다른 민자사업에 대해서도 문제가 없는지 들여다보겠다는 입장이다. 우면산 터널도 한국맥쿼리인프라가 대주주인 우면산인프라웨이가 운영하고 있다.

박원순 시장은 민주당 소속이다. '시민후보'(무소속)로 당선됐지만, 총선을 앞두고 지난 2월말 민주당에 입당했다. 그런데 민주당 내에서 박 시장의 '싸움'에 동조하는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다. 당 정책위원회에서 20일 지하철 9호선에 대해 감사원 감사를 청구하겠다는 등 입장을 발표하긴 했지만, 여당과 뚜렷한 정책적 차이를 보여줄 수 있을 뿐 아니라 실제 서민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이슈에 대해 당내 지도급 인사들이 별 말이 없다. 밖에서 보면 박원순 시장 혼자 외롭게 싸우는 것 같다.

다시 한번 짚어보자. 민주당은 이번 총선에서 왜 다수당이 되지 못했나. '내 삶을 변화시켜줄 수 있는' 정당이라는 신뢰를 주지 못해서였다. 대다수 유권자들이 원하는 건, 더욱이 먹고 살기 힘든 서민들이 원하는 건, 지금 당장 현실의 '개선'이다. 부당하게 지하철 요금 500원을 올리려는 민자사업자의 횡포에 맞서는 정치세력을 원하고 지지하는 것이다. 행여 횡포를 막지 못했다 해도, 그런 정치세력에 대해선 '다르다'고 인정해주는 게 민심이다.

민주당은 더 크게, 더 시끄럽게 지하철 9호선과 이명박 정부의 민영화 밀어붙이기에 대해 말해야 한다. 여전히 구름 위에서 올라 앉아 '중도논쟁'을 벌일 때가 아니다. 문재인 고문이 "국회의원 해보고 싶어서" 총선에 나선 게 아니라면 박원순 서울시장과 함께 '지하철 9호선'에 대해 말하라. 김진표 원내대표와 함께 '중도노선'을 말하는 게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