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칼럼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한 '청와대 출입기자' 2년 6개월

"참모진들과 사전에 논의된 문제이긴 하지만 대통령이 오늘 이 자리에서 말씀할 줄은 몰랐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24일 임기 반환점을 하루 앞두고 출입기자단과의 오찬 자리에서 '안기부 X 파일'에 담긴 지난 1997년 대선자금 관련 수사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 자리에 있던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기자들 입장에선 바로 전날 지방 언론사 편집국장단과 오찬간담회 등 최근 들어 세 차례나 있었던 언론 간담회와 달리 좀 가벼운 자리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었다. 한 청와대 고위관계자도 "노 대통령의 발언이 사전에 논의된 것이냐"고 묻자 다소 당황한 듯 "오늘 이 말씀을 할 줄은 몰랐다"고 밝혔다.

노 대통령은 이날 오찬간담회에서 모두 발언 30여분, 마무리 발언 10여분 등 50분 가까이 말을 했다. 발언 내용도 대언론 관계, 연정, 과거사 청산, 불법도청 등 만만치 않은 주제였다.

***결코 짧지 않은 2년 6개월**

솔직히 2년 반이 결코 짧지 않았다. '대통령이 오늘 무슨 말을 할지 모르는' 예측불허 상황의 연속이었다. 그러다 보니 청와대 출입기자의 업무 강도가 현격히 세졌다. 지난 2년반 동안 "노무현 대통령은…"으로 시작하는 기사를 1900개 넘게 썼다. 휴일을 제하고 얼추 하루에 세 개 정도의 기사를 쓴 셈이다. 도서관 책상과 똑같이 너비가 네 뼘 남짓한 칸막이 책상에서 정신없이 기사를 써대는 것, 그것이 과거에 정치부의 '꽃 보직'이라 불리던 청와대 출입기자인 나의 일상이다.

정치적으로 누구에게도 빚지지 않고 자력으로 대통령이 됐고, 또 대선 전날 정몽준 후보와 단일화가 깨지면서 어렵사리 승리했지만 '노사모' 등 열성적인 지지세력을 가지고 있는 만큼 50대의 젊은 노무현 대통령은 무척이나 의욕적이었다.

그래서일까. 취임 초기 기사에 자주 썼던 표현 중 하나가 '헌정 사상 처음'이다. 취임 첫해인 2003년에는 집권여당이 둘로 쪼개지는 일이 발생했다. 그래서 한동안 전체 272석 중 43석을 차지하는 초미니 여당이 존재하기도 했다. 이듬해 총선을 앞두고 2004년 초 한국사회를 뒤흔들었던 '대통령 탄핵 사태'도 '헌정 사상 초유'의 사태였다.

'개혁'을 내세운 정권은 어느 정도 시끄러울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다. 노 대통령 스스로가 얘기했던대로 "합리적 보수, 따뜻한 보수, 별놈의 수식어를 앞에 갖다 붙일지라도 보수는 '변하지 말자'는 게 본질"이라는 지적과 마찬가지로 변하자는 게 본질인 '개혁'에는 늘 저항이 뒤따른다. 저항은 곧 갈등을 낳는다. 노 대통령은 항상 이 갈등 전선의 최선두에 섰다.

***'구시대의 막내' 노무현 정권과 진보세력의 갈등**

노무현 정권 2년 반의 '시끄러움'이 보수 세력과의 갈등만은 아니었다. 대선에서 암묵적으로 노 대통령을 지지했으며, 취임 초 노무현 정권에 큰 기대를 보였던 시민단체, 노동계 등 진보세력도 그 사이에 현 정권과 각을 세우게 됐다.

부동산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민생 경제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또 최근 아시아나 항공 파업에 긴급조정권을 발동하는 등 노-정 관계도 최악의 상태다. 환경운동가들이 현 정부 정책에 반대하며 지난 연말 집단으로 광화문에서 단식 농성을 하기도 했다. 최근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제안에 대해 일부 지지자들은 "개혁 정체성을 저버리는 것"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애초 노무현 정권에 큰 기대를 가졌던 많은 이들이 '배신감'을 토로하고 있는 상황이다.

노 대통령은 언론에 '대안 없는 비판을 하지 말아달라'고 당부했지만 일부 지지세력의 '변심'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 자체가 '비판'으로 비친다면 그건 할 수 없는 노릇이다. 대통령은 대통령대로 자신의 뜻이 언론을 통해 왜곡된다고 문제제기하고 있지만, 기득권 세력도 아닌 사회적 약자인 이들에게 언론이라는 벽은 더 높다. 진보매체를 지향하고자 하는 인터넷 매체의 기자 입장에선 현 정권에 이들의 목소리를 전달해야 할 책무가 있다.

군부통치가 끝난 뒤 세 번째 '민간정부'이자, 50년만의 정권교체 후 두 번째 '개혁정권'인 노 대통령은 그래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맏형이 되고 싶었는데 구시대의 막내 노릇을 할 것 같다"고 씁쓸하게 되뇌었다. 노 대통령 입장에선 시대적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무조건 대통령 탓을 하는 국민들이 아쉬운 듯 했다. 최근 들어 지지율이 20%대에 머물고 있는 현상에 대해서도 노 대통령은 "섭섭하고 좀 억울하다"고 말했다. 국민들이 '제왕적 대통령제'에 대해 비판하면서도 '강력한 대통령'을 원하는 모순적 사고를 갖고 있다고도 수차례 지적해 왔다. 또 "총론적으로 평가하면 참여정부의 흐름이 시대 흐름에 맞는가가 첫 번째 잣대가 돼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이런저런 언급들로 미뤄보면, 임기 반환점을 도는 노 대통령은 자신의 의욕을 별로 꺾고 있는 것 같지 않다. 노 대통령은 24일 "목표로 보면 돌아서기 싫고 내려가기도 싫다"고 말했다. 시대 변화를 수동적으로 따라가기 보다는 바꿔보려는 '열정'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 열정이 과연 보수와 진보 양측으로부터의 공세를 극복해 궁극적으로 성과를 낼 수 있을지는 임기 후반기의 국정운영 상황을 지켜보면서 판단할 문제다.

***대통령 권위의 '거품' 빠진 만큼 출입기자 위상도 달라져**

나는 현 정부 '언론 정책'의 수혜자 중 한 명이다. 노무현 정권 들어 청와대 기자실이 모든 매체에게 개방되면서 권부의 핵심(?)을 지근거리에서 취재할 수 있게 됐다. 비록 기자실 개방과 동시에 비서실 출입이 금지되면서 "지근거리에서 전화 통화 할 수 있게 됐다"는 게 좀 더 정확한 표현일 때가 많지만.

"기사로는 참 많이 봤습니다." 2년 반이나 지난 지금도 기자들이 가끔 청와대 참모들과 얼굴을 맞댈 때 듣는 말이다. 때론 기자들 사이에 "청와대가 아니라 춘추관 출입기자"라는 푸념도 나온다.

지금도 출입기자단에선 청와대 홍보수석실을 통해 기자들이 비서실에 출입할 수 있게 해줄 것을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지만 청와대 측은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원칙이라는 입장이다. 청와대 측으로선 2003년 대통령직 인수위 당시 내부서류 절취 사건 등으로 곤욕을 겪은 일도 있지만 언론에 대한 '경계심'이 좀 더 근본적인 이유인 것 같다.

노 대통령은 지난 23일 지방 언론사 편집국장단과의 간담회에서 언론의 왜곡 보도가 그동안 국정 운영에 있어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고 토로하면서 "지금도 저를 대통령으로 수용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일부 언론이 있어 우리 생각이 국민들에게 바로 전달되지 않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일선 비서관들 사이에서도 "언론과 접촉해봐야 좋을 일 없다"는 정서가 일반적인 것 같다. 청와대 참모진의 바쁜 일정 때문에도 그렇겠지만 이런 언론에 대한 '불신' 때문에 그나마 허용돼 있는 전화 통화도 힘들다.

이런 '접속 불량'의 상황이 기자들의 취재를 한편으론 제약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역설적이게도 비판에 있어서 더 자유로워진 측면도 있다는 사실을 청와대측은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대통령 권위에 대한 '거품'이 서서히 빠져간 만큼 청와대 출입기자의 위상도 변했다. 대통령과 청와대 참모들이 젊어진 만큼 출입기자들도 젊어졌다. 각 언론사에서도 기자가 교체될 때마다 점점 더 젊은 기자를 내보낸다. 근래에는 20대 출입기자도 생겼다.

또 출입기자의 수가 늘어난 만큼 청와대 기사도 다양해졌다. 그러다 보니 비서관뿐 아니라 대통령이 직접 언론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일도 심심치 않았다.

임기 반환점을 맞은 노 대통령이 언론에 주문하는 것은 '창조적 대안의 경쟁관계'다. 기자 입장에선 '권력 감시자'라는 임무에 충실하고 사회의 다양한 세력들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일에 충실한 것이 정부에게 내놓는 '대안'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대안'은 '구상'이나 '이상'과는 달리 현실에 뿌리 박고 있는 것이어야 하니까.

개인적으론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한 지난 2년 6개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그 시간 동안 꽃다운 청춘(?)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