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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휴머니스트' 노회찬은 행복한 사람이었다"

[인터뷰] <노회찬 평전> 이광호 작가

"우리 국민들도 50년 동안 썩은 판을 갈아야 합니다. 50년 동안 똑같은 판에다 삼겹살을 구워먹으면 고기가 시커메집니다. 판을 갈 때가 이제 왔습니다."

언론이 '정치사에 남을 촌철살인의 비유'라고 평가한 삼겹살 불판 발언은 노회찬이 준비했던 마무리 발언의 핵심 메시지였다. 토론회(KBS <심야토론>, 2004년 3월 20일)가 끝나고 출연자들은 서로 악수를 한 뒤 헤어졌다.

네티즌들은 토론회가 끝난 심야와 새벽 사이에 노회찬의 다른 어록을 모조리 찾아내 이를 인터넷에 퍼뜨렸다. 그리고 언론은 그 내용을 기사로 썼다. ('프롤로그 : 새로운 정치언어의 탄생' 중에서) 

<노회찬 평전>이 출간된다. 사회적 불평등에 맞서 누구보다 치열하게 싸운 진보 정치인 노회찬 전 정의당 의원이 세상을 떠난지 5년 만에 나오는 책이다. '평등하고 공정한 나라 노회찬재단'이 기획하고 진보 정치 운동의 길에 고인과 함께 했던 이광호 작가(전 민주노동당 기관지 <진보정치> 편집위원장)가 썼다. 

▲<노회찬 평전>, 평등하고 공정한 나라 노회찬재단 기획, 이광호 지음, 사회평론 펴냄 ⓒ노회찬 재단
 

만 4년의 집필 기간을 거쳐 '노회찬 5주기'에 맞춰 책을 내게 된 이광호 작가는 <프레시안>과 인터뷰에서 출간 소회에 대해 "다 끝나면 좀 내려놓고 편해질 줄 알았는데 끝나니 3년 동안 수능 준비하다가 이제 점수를 기다리는 느낌"이라면서 "제 얘길 썼으면 욕을 먹어도 제 몫인데, 노회찬에 대해 썼는데 독자가 어떻게 평가할지 생각하니 부담이 크다"고 털어놓았다. 

이 작가가 "쓰겠다고 결정하기까지의 과정이 너무 힘들었다"고 밝힌 것도 노회찬이란 인물이 갖는 무게 때문이다.

"평전 집필을 요청을 처음 받은 게 돌아가신 첫해 12월에 받았고 그 다음해 5월에 결정했습니다. 그 6개월 동안 내가 이 제안을 거절하면 평생 후회하겠구나 싶었지만 만약 수락한 뒤 내가 이걸 감당할 수 있을까? 쓰겠다고 해놓고 도중에 포기하면? 그런 상상을 하니 몸이 막 떨렸어요. 근데 이건 고민한다고 될 문제는 아니고 빨리 결단을 내려야 하는데, 힘을 얻으려고 주변 사람들도 만나고 부인에게도 조언을 구했습니다. 결국 후회하는 삶을 살고 싶지 않아 쓰기로 했습니다."

정치인 노회찬, 인간 노회찬 

1974년 1월 1일. 노회찬은 일기에 이렇게 썼다. 

정치야말로 인간의 하는 일 중에서 최고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가장 큰 사업이다. 

(…) 고등학교 생활기록부를 보면 1학년 때 노회찬의 장래 희망은 '정치가'로 기록되어 있다.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정치를 선택하는 문제를 이즈음부터 생각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제2장 첼로와 유인물' 중에서)

<노회찬 평전>은 일대기 성격이다. 많은 대중들이 기억하는 정치인 노회찬 이면의 '인간 노회찬'의 이야기를 꼼꼼하게 담았다. 

"평전은 기억과 기록을 통해 집필해야 하는데, 기억은 부정확한 측면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이나 사적인 부분은 주변인들의 기억에 의존해야 했는데, 심지어 노 의원 자신의 기억도 불분명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가령 노 의원은 아버지가 함경도 원산에서 도서관 사서를 하셨다고 했는데, 당시 가족이 살던 흥남에서 원산은 너무 멀어서 출퇴근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습니다. 노 의원 아버지가 유복자인지, 아닌지에 대한 부분도 가족들의 기억이 엇갈렸어요. 이런 부분이 전체 내용 흐름에 큰 영향을 주지는 않지만, 작가 입장에선 팩트 하나하나가 너무 중요하고 이를 확인하는 과정에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다행히 노 의원이 어린 시절에 일기를 정말 많이 썼어요. 큰 도움이 됐습니다."

"노회찬재단에서 기획한 첫번째 평전이라서 저는 노회찬에 대한 제대로된 그림을 그려 드리면 독자들이 보고 다양한 평가, 느낌, 소회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노회찬의 정치, 리더십, 언어 등에 대해 본격적으로 서술한 책은 아닙니다. 제가 책을 쓰면서 노회찬의 정치, 리더십 부분에 대해선 따로 평전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재단에서도 이런 데 신경을 많이 썼으면 좋겠습니다." 

인민노련, 노회찬의 투쟁과 사랑 

1985년이 왔다. 외면하려 했지만 그런다고 피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항상 마음 한구석에 납덩이처럼 매달려 있던, 몇년을 미뤄왔던 숙제를 이제 해야 했다. 노회찬은 부모님을 더 이상 속일 수 없었다.(…) "왜 하필 이 길이냐." 어머니의 한마디는 짧았지만 대하소설만큼 긴 사연이 그 안에 들어있었다.(…) 어머니는 장남의 통보를 듣던 날 스케치북을 마련하고 노동 관련 뉴스를 스크랩하기 시작했다. 오빠와 남동생이 운동의 길로 접어들었기에 그 길의 고단함을 알고 있던 어머니는 장남을 생각할 때마다 '설마'와 '혹시'를 오가며 마음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제4장 지하에서 꿈꾼 지상의 혁명' 중에서) 

이 작가는 평전을 쓰면서 어려웠던 부분 중 하나로 노회찬의 '인민노련(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시절을 꼽았다. 인민노련은 노회찬, 권우철, 주대환, 최봉근, 황광우 등이 활동한 남한 최대의 '지하운동 조직'이며 진보정당의 모태가 되기도 했다. 당시 활동가들은 전두환 정권에서 수배를 받으면서 활동을 하다보니 철저한 보안 속에 움직여야만 했기 때문에 노회찬의 행적을 생생하게 재구성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노회찬하면 인민노련이 자동으로 떠오를 정도로 중요합니다. 그런데 '지하 조직'이다보니 인민노련에서 일한 사람들도 전모를 잘 몰랐습니다. 전두환 정권이라 보안이 너무 중요한 시절이라서 노 의원 본인도 조직 책임자인 자신 밖에 인민노련의 전모를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집필할 때 인민노련 부분을 최대한 생생하게 담고 싶었는데 욕심만큼 하지 못했습니다. 1983년에 인천에 내려가서 1989년 중앙 사업을 한다고 서울을 올라오기까지 노 의원이 어떻게 움직였는지 사람들이 잘 몰라요. 그래서 제가 고민하다가 오순부 등 당시 만났던 현장 노동자들을 통해 우회적으로 접근했습니다." 

인민노련 시기가 노회찬에게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에 대해 "이 시기에 한 여성을 만났고, 자신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 가운데 하나로 꼽은 결혼을 했다"고 이 작가는 책에 썼다.  

▲이광호 작가 ⓒ프레시안(한예섭)

'일 잘하는' 정치인 노회찬의 머리, 가슴, 발 

이 작가는 서문에 재단 관계자로부터 집필을 제안받은 이유에 대해 민주노동당 창당 때부터 노회찬과 함께 당 활동을 했지만 "노회찬과 별로 가까이 지내지 않아"서 "노회찬이라는 인물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서술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적임자 중 한 사람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런 이 작가는 집필 작업을 통해 누구보다 노회찬에 대해 속속들이 알게 되면서 "그가 대단히 훌륭한 정치인이었구나를 깨닫게 됐다"고 말한다. 

"노 의원이 곁을 쉽게 내주는 사람이 아니다, 내성적인 사람이다, 말수가 적다고 기자들이 다들 얘기하더라구요. 노 의원이 내성적인 성격이라고 하면 깜짝 놀라는 사람들이 있는데, 하나가 가족들이고, 다른 한 부류가 고등학교 친구들입니다. 저와 친해지지 않았던 이유도 이 분은 술 마시면서 쉽게 서로 형님, 아우 삼고 이런 식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노 의원은 자신이 어렵고 힘들다는 얘기를 절대 안 하는 사람이더라구요. 제가 집필할 때 부인인 김지선 선배나 중고등학교 친구들한테는 어려움 털어놨겠지 생각했는데, 정말 아무한테도 안했어요. 그 정도로 자기 절제가 강하고 철저했던 분입니다. 

또 노회찬을 '말 잘하는 정치인'이라고들 하는데 사실 '일 잘하는 정치인'입니다. 노회찬의 신뢰가 말을 재미있게 잘 해서만 얻어낸 것일까요? 아니죠. 가령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논쟁 당시 FTA 내용을 정확히 알고 거기에 대해 자기 입장을 갖고 조목조목 설명할 수 있는 의원들이 많지 않잖아요. 노회찬은 그게 다양한 분야와 현안에서 가능한 정치인이었고, 그래서 사람들의 신뢰를 얻었습니다. 이는 부단한 노력과 공부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정치인이 돼서 자기 출세에만 관심 있었다면 절대 할 수 없는 행보입니다. 

노 의원이 존경한 신영복 선생이 "머리에서 가슴, 가슴에서 발까지의 가장 먼 여행"을 말씀하셨는데, 노 의원은 뛰어난 머리, 현장에 가서 노동자를 만났을 때 가지는 심장, 그리고 정말 부지런히 현장을 찾아간 발, 이 모든 것이 결합된 정치인이었습니다." 

노회찬의 휴머니즘, 사회주의, 사민주의 

그런 '가슴'과 '발'을 가졌기에 가능했던 연설이 '6411번 버스 연설'이다. 

"(2012년) 10월 21일, 노회찬은 '6411 버스 연설'로 널리 알려진 당대표 수락 연설을 했다. 2010년 서울시장 선거 때 구로에서 출발해서 강남 개포동까지 가는 6411번 버스 첫차를 탔을 때 만난 버스 안 풍경을 떠올리며 준비된 원고 없이 한 연설이었다.(…) 노회찬이 6411 버스 연설에서 불러낸 첫차를 타는 버스 승객, 현대차 비정규직, 쌍용차 해고 노동자, 용산 참사 피해자들은 노회찬 정치의 존재 이유였다." ('제9장 정치적 사형 그리고 부활' 중에서)

많은 이들이 '6411 버스 연설'에 '노회찬 정신'이 응축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 작가는 평전에서 '노회찬의 정신과 이념'으로 휴머니즘과 민중성, 사회주의와 급진성, 사민주의와 현실성을 꼽았다. "서로 모순되는 측면도 있다"는 지적에 이 작가는 자본주의와 분단의 모순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한국에서 '6411번 버스의 유령 같은 저소득층 노동자들의 삶'에 대한 실질적인 개선을 위한 노회찬의 치열한 고민과 부단한 노력이 결국 이런 "모순"을 가져온 것이라고 해석했다. 

노회찬이 꼽은 '내 인생의 한 마디'는 신영복이 말한 '함께 맞는 비'였고, 그는 비가 내리는 현장을 떠난 적이 없었다. 민중성과 급진성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인 '현실성과 현장성'은 노회찬이 가장 그다울 수 있었던 특성이었고, 노회찬 정치의 '발'에 해당되는 가치였다. ('제10장 노회찬의 정신과 이념' 중에서) 

노회찬의 마지막 하루 

노회찬 의원은 2018년 '드루킹 사건'과 연루 의혹이 제기되면서 세상을 등졌다. 너무나 갑작스럽고 안타까운 죽음에 대해 이 작가는 "개인적으로 안 쓸까도 고민했지만 일대기를 쓰는 사람으로서 다루는 게 의무가 아닐까 생각이 들어서 조심스럽게 썼다"고 밝혔다.  

그는 평생 선당후사의 삶을 살았지만 따지고 보면 선후가 없었다. 당은 노회찬의 확장된 자아였다. 생의 마지막 몇달 동안 그가 겪었을 정신적 압박은 견디기 힘들만큼 무거웠고, 마음은 홀로 외로웠으며, 심신은 점차 지쳐갔을 것이다. (…) 숱한 고뇌의 날들을 보내면서 그는 결국 선택의 기로에 섰다. 하지만 그의 선택이 감상 또는 감정이 결정적 요소였을 리 없다. 그는 상황에 내몰린 채가 아니라 평소 자신의 원칙에 근거해서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당의 진로를 최우선의 가치로 두고 선택했을 것이다.(… ) 노회찬은 그토록 사랑했던 당의 앞길에 자신의 잘못이 '큰 누'를 끼치게 하는 사태를 용납할 수 없었다. ('에필로그 : 백척간두에서 내딛은 한 걸음' 중에서) 

이 작가는 노 의원의 '죽음'에 대해 자신이 혈육보다 사랑한 '당'을 위한 "차가운 계산 속에 나온 선택"한 것이라며 "조카 노선덕 씨에게 노 의원이 평소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잘 모르겠을 때 '제일 어려운 걸 선택하라'고 얘기했는데 본인이 그 선택을 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노회찬은 행복한 사람이었다 

이 작가는 이처럼 비범한 운동가이자 진보 정치인이었던 노회찬의 삶을 범접하기 힘든 '위인'으로 보거나, '이타적 삶', '희생적 삶'으로 보는 것에 대해선 반대했다. 

"노 의원은 누구보다 자기 인생을 진하게 살다간 사람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마지막에 커다란 비극으로 삶을 마치긴 했지만 행복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보통 내가 먹고 살기 위해 타인과의 경쟁 속에서 자기 자신을 규정하는 게 일반적인데 노회찬은 굉장히 확장된 자아를 갖고 있었습니다. 노 의원은 '나를 위해 사는 것'과 '나를 버리고 남을 위해 사는 것'이 충돌되지 않는 자아를 가졌습니다. 물론 이건 쉽진 않지요. 그런데 노 의원은 자본주의 속에서 구조적으로 가장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 덜 힘들게 사는 것, 이런 측면에서 '세상을 뒤엎는 일'이 자신의 직업이자 자신의 삶이라고 봤기 때문에 이렇게 확장된 자아를 가질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이런 생각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고, 이게 노 의원의 목표이자 자신의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노 의원은 자신이 휴머니스트라고 불리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의 휴머니즘은 자본주의 체제의 비인간적 측면을 극복하기 위한 이념이었고, 사회주의는 휴머니즘과 사상적 동반자가 되었다. 그가 "가장 진보적인 이념은 휴머니즘"이라고 말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 일, 그것을 가로막는 부당한 억압과 착취를 근절하기 위해 싸우는 일이 노회찬의 직업이었고, 바탕에는 인간 사랑, 휴머니즘이 있었다.(…) 노회찬 정치에서 휴머니즘이 들어갈 자리에 '민중성'을 넣어도 의미가 크게 변하지 않는다. 민중성이 노회찬 정치의 출발점이며 목적지였다. 그는 1981년 참당암에서 결의할 때도, 인천에서 노동운동을 할 때도, 2004년 초선의원이 되었을 때도, 2016년 창원 선거에 나섰을 때도 그가 전하는 핵심 메시지는 같았다. '민중의 바다'로 나아가서 그들과 함께 싸우고 세상을 바꾸는 일을 쉬지 않겠노라, 이게 수십년 동안 그가 일관되게 해온 말이다.('제10장 노회찬의 정신과 이념' 중에서) 

▲이광호 작가 ⓒ프레시안(한예섭)

'휴머니스트' 노회찬의 삶은 어쩌면 평범한 나의 삶과 멀어보이지만, 또 한편에선 가깝기도 하다. 다른 사람과 내 삶의 '차이'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일상'을 확보하려는, 이런 '보편적 꿈'을 위한 '집단적 노력'이 결국 노회찬이 꿈꾸던 '평등하고 공정한 나라'와 맞닿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