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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프러제트'와 '강남역 살인 사건'

최근 강남역 살인 사건을 계기로 곳곳에서 여성들의 분노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상황을 보면서 영화 '서프러제트'가 떠올랐다. 이 영화는 20세기 초 영국 여성들의 투표권 획득을 위한 처절한 투쟁을 다룬 영화로, 작년에 만들어졌지만 한국에서는 상영관에 오르지 못하다가, 올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개막작(6월 2일)으로 선정돼 관객들을 만나게 됐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여성은 침착하지도 조화롭지도 못해서 정치적 판단이 어렵습니다. 여성에게 투표권을 주면 사회구조가 무너집니다. 남자들이 여성을 대변하는데 왜 필요합니까?"

 

영화의 배경인 1910년대 영국 남성 정치인들의 주장이다.

 

세탁공장에서 나서 자라 세탁공장 노동자가 된 주인공 모드 와츠(캐리 멀리건)는 우연히 서프러제트(여성 참정권 운동)에 뛰어들게 되면서 여성이자 노동자, 그리고 한 아이의 엄마로서 '권리'에 대해 눈을 뜨게 된다. 하지만 그 대가는 말할 수 없이 컸다. 감옥에 한두 차례 수감되면서 공장에서 해고 당하고, 남편에게 쫓겨나게 된다. 남편이 급기야 아들마저 다른 집에 입양을 보내 아이와도 생이별을 하게 된다. 


영화는 참정권 투쟁에 참여한 여성들의 투쟁과 그로 인해 겪었던 고초를 매우 상세히 보여준다. 이들은 집회와 시위 뿐 아니라 공공건물이나 상점의 유리를 돌을 던져 깨뜨리거나, 공직자의 집에 몰래 침입해 폭발물을 설치하기도 한다. 


이런 '과격한'(?) 운동 방식에 대해 참정권 운동의 '대모' 애멀린 팽크허스트(메릴 스트립)는 한 연설에서 이렇게 그 정당성을 주장했다고 한다. 


“내가 돌을 사용하려는 이유는 감정적인 것 때문이 아닙니다. 돌을 던지는 것이 더 효과적인데, 왜 여성들이 의회 광장에 가서 매를 맞고 욕을 먹어야 합니까? 영국에서 남성들이 창문을 깨면 정치적 의견을 정직하게 표현하는 방식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영국 여성들이 창문을 깨면 범죄가 됩니다."


영화에서 모드 역시 마찬가지로 항변한다. "우리가 창문을 깨고 물건을 태운 건 그래야 남자들이 알아듣기 때문이죠. 우린 두들겨 맞고 배신당해서 남은 게 없었으니까요. 우리 모두를 막진 못해요.”


영화는 1913년 있었던 '에밀리 데이비슨 사건'으로 끝을 맺는다. 이 사건은 더비 경마대회가 열리는 경마장에서 당시 옥스퍼드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던 에밀리 데이비슨이라는 학생이 왕실 소유의 말 앞으로 뛰어들어 말에 치여 숨진 사건이다. 에밀리 데이비슨은 죽으면서 "여성에게 투표권을"이라고 외쳤다고 한다.    


영화는 이 사건으로 마무리 됐지만, 여성들에게 실제 참정권이 주어진 계기는 '전쟁'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여성 참정권 운동은 중단됐다. 남성들이 전쟁에 참여하면서 부족한 노동력 때문에 자연스레 여성들이 기존에 남성들이 하던 노동을 하게 됐고, 사회적 발언권도 커지게 됐다. 1918년 영국 정부는 30세 이상의 여성에게 참정권을 허용했고, 1928년 21세 이상의 모든 여성들에게 참정권을 허용하는 법률이 통과됐다. 팽크허스트는 이 법안이 통과되기 일주일 전 세상을 떠났다. 


영화라는 한계 때문에 '서퍼러제트' 운동에 대해 단순화하고 피상적으로만 다룬 측면은 분명히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과 이후 벌어진 '여성 혐오' 논쟁을 보면서 20세기 초 자신의 몸을 던져 싸웠던 '서러퍼제트'들이 떠올랐다. 한국 여성들은 1948년 해방 이후 형식적인 의미의 참정권과 시민권은 저절로 주어졌다. 하지만 조선조 이래 강고하게 뿌리 내린 '유교적 가부장제'로 여성들이 실질적인 시민권을 인정 받지 못하고 있다. 이는 각종 여성 통계 지표에서 세계 하위권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모든 사회적 변화는 싸우지 않고 얻어지지 않는다. 어쩌면 '강남역 살인 사건'을 계기로 터져 나온 여성들의 추모와 분노의 움직임이 그 시작이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다란 싸움과 그로 인한 사회적 변화의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