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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서민 코스프레'는 그만~ '투표시간 연장'을 말하라!(2012.9.24)

'이회창 흙오이 사건'은 한국 정치에서 정치인과 서민 유권자 사이의 복잡한 함수 관계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이회창 후보는 전통시장을 방문했다가 상인이 건네는 흙 묻은 오이를 털지도 않고 먹었다고 한다. 이 광경을 봤다는 사람은 있으나, 이후 포털 사이트 등 어디에서도 이 사진을 찾을 수 없게 되면서 누리꾼들 사이에 더 화제가 됐다.

뜬금없이 10년 전, 그것도 이번 대선에 출마도 하지 않은 정치인 일을 언급하는 것은 추석을 일주일 앞두고 지난 주말 대선 후보들의 전통시장 방문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제 막 후보로 선출되거나 출마 선언을 한 야권 후보들이 약속이나 한 듯 전통시장을 찾았다. 22일 무소속 안철수 후보가 수원 못골시장을 찾은데 이어, 23일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는 서울 망원시장을 방문했다. 두 후보 모두 시장을 찾아 상인들의 고충을 듣고 그 자리에서 '대형마트 규제'를 약속했다.

'전통시장 방문'은 영세 상인들 뿐 아니라 지역 주민들까지 만날 수 있고, '친서민' 이미지를 표방한 사진 한 장을 남길 수 있다는 점에서 정치인들의 '필수 코스'다. 대기업 CEO 출신인 이명박 대통령은 대선 때 뿐 아니라 임기 중에도 여러 차례 전통시장을 방문했고, 국밥, 어묵, 만두 등을 먹는 사진을 남겼다.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후보도 지난 8월 21일 대선 후보로 확정된 이후로는 아직 전통시장을 찾지 않았지만, 패배가 예상됐던 상황에서 과반이 넘는 압승을 거둔 지난 4월 총선에선 숱하게 전통시장을 찾았다.

정치인들의 방문을 시장 상인들은 일단 반가워하지만, 속마음은 반갑기만 한 것은 아니다. 사진 한방과 위로의 말 한마디 이상의 그 무엇을 정치인들이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인들 뿐 아니라 다른 서민 유권자들도 마찬가지 심정이다. 그러니 시장을 찾아 사진 한 장 찍기에 바쁜 정치인들에게 '서민 코스프레'라는 비아냥이 나온다. 개인의 정치 호불호가 깔린 일이겠지만, 이회창 후보에게 흙 묻은 오이를, 작년 서울시장 재보궐선거에서 나경원 후보에게 살아있는 개불을 건넨 상인들의 마음은 오죽해서였겠나.

ⓒ연합

12월 대선을 앞두고 '서민 코스프레' 이상을 할 수 있는 이슈가 정치권에 던져졌다. 바로 '투표시간을 연장하자'는 주장이다. 대통령 선거 등 임기 만료 선거의 투표 시간을 법정공휴일로 변경하고 투표시간을 현재 재보궐선거 마감시간인 오후 8시, 내지는 그 이후로 늦추자는 것이다. 민주통합당은 23일 이같은 내용의 공직선거법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박지원 원내대표는 "선거 때마다 투표율이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추세"라면서 "이는 국민주권을 포기하는 것이자 선거가 국민의 뜻을 점점 대변하지 못하는 것이어서 민주주의 기본이 흔들릴 수 있다"고 투표시간 연장을 추진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노동계, 시민단체, 누리꾼 등도 정치권에 이를 적극 요구하고 나섰다. 민주노총은 21일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 후보에게 투표시간 연장 등 투표율을 높이기 위한 방안에 대해 공개질의했다. 이들은 특히 "2011년 중앙선관위가 발표한 '비정규직 투표실태'에 따르면 기권자의 64.1%가 외부적 요인에 의한 기권으로 나타났다"고 실제 '직장에서 잘릴까봐' 헌법이 보장하는 참정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유권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강조했다. '생계' 때문에 투표권을 포기하는 대표적인 이들이 비정규직 노동자와 영세 상인들이다.

현재 다음 아고라(바로가기)에서 누리꾼들도 투표시간을 밤 10시까지 연장하자는 입법 청원 서명을 받는 등 여론도 매우 호의적이다. 트위터에선 '일본 7시-20시, 영국 7시-22시, 미 캘리포니아주 7시-20시, 스웨덴 8시-20시, 이탈리아 6시30분-20시 등' 각국의 투표시간을 비교하는 글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안철수 후보의 '생각'이 어떤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현재 새누리당의 반대로 투표시간 연장 문제에 대한 논의가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고 있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는 지난 18일 새누리당의 반대로 이와 관련된 법 개정안에 대한 처리를 하지 못했다. 새누리당은 투표 시간 연장에 따른 선거 관리 비용 등의 증가를 반대 이유로 제시하고 있지만, 국민의 참정권 보장이라는 명분에 비교하면 약하다. 그러다보니 투표시간을 연장해 투표율이 올라가면 불리해지니까 그러는 게 아니냐는 정략적 차원의 해석이 나오는 셈이다.

대선 후보로 확정된 이후 지난 한달 동안 박근혜 후보는 '인혁당 발언' 등 과거사 문제로 곤욕을 치렀다. 과거 문제로 궁지에 몰릴 때마다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 대해 얘기하자'고 응수해왔다. 투표 시간 연장을 포함해 참정권을 보장하는 문제는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와 연관된 매우 중요한 이슈다. 새누리당과 박근혜 후보의 전향적 입장 변화를 촉구한다.

덧붙이자면 투표율을 높이기 위해 후보들이 할 일이 하나 더 있다. '그놈이 그놈'이라는 자포자기로 소중한 한 표를 포기하는 유권자를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치열한 정책 싸움이 됐든, 선거 운동 방식의 변화가 됐든, 실질적인 '변화'를 유권자들이 피부로 느끼게 해야, 기꺼운 마음으로 투표장을 찾는 유권자들이 늘어날 것이다. 현실적으로 이 부분에 대한 책임은 '투표시간 연장'에 찬성할 가능성이 높은 문재인, 안철수 두 후보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